J는 한국에서 왔어. 한국 인삼차!

엔지니어 R할아버지

by 탐구와여정

심리학자 C할머니가 있는 네이버후드에는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쓴 채 오고가는 모든 이들의 동태를 살피는 R할아버지가 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은 꽤나 동안인데다 인사도 반갑게 하고 말도 조곤조곤 곧잘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하자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고는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코리안 진생티'를 이야기하면서 인삼차가 몸에 좋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예전에 한 번 먹어봤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나서 나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와 안부 인사를 하면서 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다시 R할아버지 쪽으로 오자 할아버지는 "J (나를 이르는 말이다)가 여기 있어. J는 한국에서 왔어. 코리안 진생티"라고 중얼거렸다. 혼자말처럼 기억과 정보를 되뇌이기 위해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치 나를 소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물론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나는 다시 한번 R할아버지를 보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재미있는 것은 R할아버지 가까이 가기만 하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때마다 R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웃음이 나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나에 대해 읊을 때마다 옆에 있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매번 그렇다고 하면서 나의 이름과 출신지를 다시 한번 말해주고는 했다.

R할아버지는 사교적이면서도 영민해보였다. 기억과 정보를 더듬어 계속해서 읊조리는 것은 주변에 관한 관심이 많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였다. 실제로 나에게도 R할아버지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들을 하나씩 알려주었고 때로는 자신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분명히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애타고 조바심이 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선에서 최대한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야기해주면 R할아버지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몇 번을 중얼거리면서 머릿속에 저장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역시나 할아버지는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 이것저것을 물어보자 R할아버지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모든 기억과 정보를 아주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여기는 언제 오셨어요?" "2년 전 크리스마스 날 왔어." "여기가 좋으세요?" "응 편안하고 모든 것이 공짜야. 라호야에 있는 우리집이 있어. 아들이 거기 살고 있어. 10일 뒤에 아들이 나를 치과에 데려갈거야. 그리고 집에도 데려갈거야." "아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려. 책도 냈는데 아마존에서 살 수 있어." R할아버지는 한번씩 질문을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심지어 묻지 않은 것까지도 생각이 나면 다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전기 엔지니어였어. 샌디에고 전기&가스 공사에서 적어도 20년은 일했어. 그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했어. 컨설팅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자문을 해주고 리포트를 써주면 한페이지 당 100불씩 돈을 받았지. PE 등록증도 가지고 있어." "PE가 뭐예요?" "Professional Engineer." '고향은 어디세요?" "태국. 나는 태국어, 중국어, 영어를 할 수 있어. 고모와 사촌들이 태국에 살고 있어. 그곳에서 망고와 땅콩, 캐슈너트 관련 가족기업을 하고 있어." "내가 스무살 때 미국에 왔어.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어. 학부를 마치고 온라인으로 석사도 마쳤지. 아내는 52세에 죽었어. 아내는 간호사로 일했어. 나는 72세고 아들은 38세야."

R할아버지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 지내고 있는 이곳은 은퇴자를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퇴를 하고 이곳에 왔어. 아들이 이곳에 있으라고 했어. 여기는 잠시 머무는 곳이야. 모든 것이 공짜야." "건강은 어떠세요?" "몸도 마음도 건강해. 이곳에는 있을 만큼 충분히 있었어. 결국에 아들이 나를 집에 데려갈거야." "이곳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 S, K, C 등등. 근데 이곳에서는 할 일이 많지 않아. 나는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이곳저곳을 다녔지." "공원도 가고 레스토랑도 가고 동물원도 갔지."

할아버지의 기억이 어느 정도로 정확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꽤나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중 나이 등 숫자와 관련된 몇몇은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그밖의 정보들, 예를 들면 이름이나 장소, 직업과 타이틀 등은 분명 정확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줄줄이 늘어놓던 수많은 이름들, 가족들, 그들의 직업과 사업들, 자신이 살던 장소들과 학위들, 그리고 직업과 타이틀 등. 남들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그다지 관심도 없을 만한 것들임에도 마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대답하는 로보트처럼 R할아버지는 술술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남들이 관심을 보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R할아버지는 혼자서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런 R할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자부심도 있었고 향수도 있었으며 애정과 애틋함도 있었다.어쩌면 R할아버지는 나 혹은 다른 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라고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해둔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뇌이면서 이를 잊지 않으려 갈고 닦는 것은 아닐까. 남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기를,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계속해서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온 J인 나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오랫동안 R할아버지의 머릿속에 저장될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를 볼 때마다 이를 되뇌이는 R할아버지를 보면서 나에 대한 관심에 감사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둘씩 잃어가고 무뎌져가는 자신의 기억력을 갈고 닦으려는 할아버지의 노력이 애틋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부디 나를 만날 때마다 되새기는 나의 정보가 R할아버지의 노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나에 대한 정보는 잊혀지더라고 R할아버지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그의 머릿속에 남아주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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