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C할머니의 남자친구 R할아버지
네이버후드를 바꿔 옮긴 이후 C할머니의 상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느날은 보니 C할머니와 R할아버지의 사이가 무척 좋아보였다. 서로 옆자리에 앉아 간간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나 활동들을 찬찬히 살피고 다른 레지던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가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 그러자 R할아버지가 바로 내 이름을 부르며 "안녕, J! J는 한국에서 왔어, 한국 인삼차!"라고 혼잣말인지 아니면 C할머니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C할머니도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 몇 번은 나를 잘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내가 익숙한지 활짝 웃으며 맞아주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응, 좋아." "불안감이나 식은땀은 없으시고요?" "응, 괜찮아졌어" R할아버지가 옆에서 끼어든다. "C는 심리학자야. 하와이에서 왔어" 그러자 C할머니가 말했다. "더 이상은 심리학자가 아니에요. 은퇴했으니까요" "응, 나도 은퇴했어" 나는 이곳이 좋으시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응, 사람들도 좋고 활동들도 많아" R할어버지는 오늘의 스케줄표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어 내게 읊어주었다. 그날 하는 활동들을 보고 스케줄에 따라 그날의 모든 활동에 다 참석할 기세다.
C할머니는 이곳이 은퇴 후 다양한 활동들을 하기 위해 잠시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R할어버지 또한 이곳이 은퇴자들을 위해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R할어버지는 나에게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다. 첫번째 활동이 시작하기를 꽤나 고대하고 있었다. 간단한 명상과 운동을 한 뒤 그리스로 랜선여행을 떠나는 활동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시간이 되어 준비가 다 끝나자 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란히 걸어서 액티비티룸으로 향했다. 서로 옆자리를 챙기며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란히 붙어있었다. 할머니가 앉도록 할아버지가 자리를 챙겨주고 할아버지가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서면 그 자리를 할머니가 잘 지켜주었다. 중간에 간식을 먹을 때에도 할머니가 너무 많아 남기기라도 하면 할아버지에게 건네주기도 하고 서로의 쓰레기를 치워주기도 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신경써주는 모습이 돋보였다.
두 할머니 할아버지는 혼자 따로 있을 때보다 확실히 더 나아보였다. 심적으로도 안정되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얼굴에 미소가 장착이 되어있었다. 어딜 가든 둘이서 같이 갔고 나란히 걸었고 두 손을 꼭 잡기도 했다. 가끔씩 가족이 방문하여 가족과 함께 각자의 시간을 보낼 때나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쉬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둘이서 함께였다. 이러한 공용 생활에 있어 로맨스는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듯이 두 할머니 할아버지의 로맨스도 또 하나의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약간은 다른 점도 있는 듯했다.
흔히 새로운 할머니나 할어버지가 등장하면 기존 레지던트들 중에서도 이들과 유난히 친해지는 누군가가 등장한다. 만약 그것이 로맨스라면 아주 빠르게 불이 붙어 어디든 둘이서만 함께 다니며 때로는 둘이서만 단독으로 다니기도 하고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좋다가 어느 순간 둘 사이에 냉전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각자 떨어져 따로따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와 신경전을 주변의 누구든 눈치채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어느 하나가 다가가면 다른 하나가 나무라면서 설전을 벌이기도 하다. 이내 화해를 하기도 하고 아니면 풀지 못하고 냉전이 더 이어지기도 한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로맨스도 다른 네이버후드의 한 편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의 로맨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뜨거운 열정과 화려한 서사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C할머니와 R할아버지의 로맨스는 약간 달랐다. 일단 두 사람은 혼자서도 잘 지내고 주변 사람들과도 가리지 않고 교류하는 스타일이었다. 매사에 관심이 많았고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보다는 바라보는 성격이었다. 친절하기는 했지만 관계의 어려움도 알고 있었고 상대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지킬 줄 알았다. 이러한 두 사람이 서로 친해지자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잘 융화가 되면서 각자의 개성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챙겨주는 쪽으로 잘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C할머니는 배려와 친절이 몸에 배었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상대를 만나면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R할아버지는 관심과 사교성이 풍부했지만 다소 외곬인 성향이어서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다니는 스타일이었다. C할머니의 불안을 R할어버지의 무난한 성격이 보듬어주었고 R할아버지의 외곬 성향을 C할머니가 섬세한 배려로 품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렇게 어디든 함께 가고 오랜 시간을 서로 꼭 붙어지내면서도 다툼이나 불편함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혼자보다 같이 있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면서, 각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이후로 C할머니의 불안 증세는 훨씬 나아졌다. 가끔씩 무릎과 두통 등 몸의 이상 증세 때문에 힘들어하기는 해도 심리적으로는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R할아버지도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사실 R할아버지는 처음 이 시설에 들어올 때만해도 굉장히 사교적이고 밝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며 집에서와 같은 자율이 주어지지 않고 육체적/정신적 쇠퇴를 경험하며 무언가 충격과 좌절을 겪은 때문인지 갑자기 성격이 다소 어두워지고 체중도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했다. 그랬던 R할아버지는 C할머니의 세심하고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녹고 얼굴이 밝아지게 된 것이었다. 상대를 향한 관심과 배려,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와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는 관계, 이는 C할머니와 R할아버지 사이의 사랑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