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탐구와여정 Apr 03. 2021

[6] 의심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후회

오페라 '로엔그린' '유진 오네긴'

인간다움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함이 아니라 미숙함과 어리석음에서 발견된다. 욕망이든, 오만이든, 욕심이든, 질투든,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행동은 운이 좋아 지나쳐지지 않는 이상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운이 좋아 지나쳐졌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결국은 더 큰 화를 불러오지만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그 대가에 대해 어떠한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엄청난 후회와 고통을 동반할 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더 나아지려고 하는 자세에 있다. 그러다보면 인생은 충분히 길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겠는가.

어리석음은 착함이나 오만함을 가리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오만한 사람이든 어리석음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곤 한다. 너무 착해서 또는 너무 오만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어리석음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따라서 측은한 마음이 들고 안타까우면서도 자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바그너의 ‘로엔그린’에서 엘사는 순진무구하고 순결하며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여인이다. 흔히 동화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착하고 순진한 여인이 주변의 도움과 좋은 운으로 해피엔딩을 겪지만 이는 한마디로 비현실적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착하고 순진한 여인은 악인이나 사기꾼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로엔그린’은 일면 동화처럼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동생이 마법이 걸려 백조로 변하는가 하면, 꿈에서 나타난 기사가 현실에서 등장하고 반드시 해서는 안되는 금기를 정하는 등 한마디로 우화적이고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엘사는 텔라문트 백작에 의해 사라진 동생에 대한 살인자로 몰려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 흠없이 순결하며 고귀한 성품을 지닌 엘사는 이러한 와중에도 스스로를 변론하는 대신 자신의 꿈에 나타난 기사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엘사가 기도하자 백조를 타고 하얀 옷을 입은 기사 로엔그린이 나타나고 그는 엘사의 결백을 주장한다. 로엔그린은 순수한 엘사의 기도로 나타난 것이고 순수한 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자였다. 엘사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백작과의 결투를 제안하고 승리한 로엔그린은 백작에게 영지를 떠날 것을 명령한다.

엘사와 결혼을 하기로 하고 영지를 지키고 보호하는 지도자가 된 로엔그린은 그러나 엘사에게 단 한가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절대로 물어보지 말라는 것. 엘사는 당연히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결혼식을 준비한다.

결투에서 진 백작은 명예가 실추되고 영지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대해 아내 오르트루트를 탓하고 나무란다. 오르트루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로엔그린에게 복수하고 그를 무력화시킬 계략을 세운다. 자신의 정체와 출신을 묻지 말라는 조건을 이용해 로엔그린을 쫓아낼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아무런 의심없이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고 있는 엘사를 보며 자신의 행복을 빼앗긴 것에 대해 원망과 복수의 결의에 찬 오르트루트는 엘사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접근한다. 애초에 엘사 남매를 없애고 자신의 남편을 영주로 만들기 위해 이 모든 계략을 꾸몄던 오르트루트는 엘사의 마음에 의심과 불안을 심기 시작한다.

로엔그린이 정체를 숨긴다는 것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거나 출신이 고귀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의심,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떠나버려도 속수무책일 것이라는 불안. 이러한 의심과 불안은 점점 엘사를 잠식해온다. 

결혼식장에서 백작은 로엔그린이 마법을 부리는 부정한 자라고 모함하며 소란을 피우지만 로엔그린은 이를 잠재운다. 또한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엘사를 저주하는 오르트루트로 인해 심신이 상한 엘사를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결혼식을 마무리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로엔그린' 한 장면

결혼식을 모두 마치고 비로소 단 둘이 있게 된 로엔그린과 엘사. 두 사람이 행진해서 들어올 때 울려퍼지는 노래가 그 유명한 결혼행진곡이다. 밝고 명랑한 멜로디가 친숙하고 아름답지만 가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어딘지 모르게 진지하고 엄숙한 면이 있다. 마치 이후에 일어날 비극을 경고하듯이 말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로엔그린과 엘사는 이내 엘사가 불안해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로엔그린은 엘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엘사는 참지 못하고 로엔그린의 이름과 출신을 묻는다. 로엔그린은 자신이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을 엘사가 지키지 못했기에 떠나기로 하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성배의 왕국에서 온 성배의 기사 로엔그린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 떠나간다. 

자신이 백조로 변신시킨 고트프리트의 마법을 풀 수 있는 로엔그린이 떠나가자 오르트루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와 자신의 모든 만행을 밝히며 고소해한다. 하지만 로엔그린은 고트프리트를 다시 인간으로 변모시키고 그를 영주로 선언한다. 엘사는 떠나가는 로엔그린을 바라보며 애통해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https://youtu.be/l3usyPyFQMw

착하고 순수한 것만 가지고는 결국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킬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짓과 악을 물리칠 수도 없었고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선 불안과 의심을 잠재울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가진 것을 잃고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엘사를 두고 떠나가는 로엔그린이 매정하게 생각되지만 그의 역할은 순수함과 고결함을 가진 사람을 지키는 것이지 누군가를 순수하게 만들거나 고결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순수함과 고결함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임무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인간은 지혜를 얻고 강인해질 필요가 있다.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 


후회로 점철된 인간의 회한은 차이코프스키의 ‘유진 오네긴’에서도 절절히 그려진다. 타티아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으며 여주인공에 빙의되어 로맨스를 꿈꾼다. 그녀의 동생 올가는 이웃의 시인 렌스키와 사랑에 빠져있지만 사랑에 그닥 진지하지는 않고 그저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편이다. 

어느날 렌스키는 친구 오네긴과 함께 연인 올가의 집을 방문하고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밤새도록 연애편지를 써 다음날 아침 오네긴에게 보낸다. 오네긴의 답변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사랑, 흥분, 부끄러움, 후회가 넘나드는 감정을 겪으면서도 타티아나는 자신의 감정이 오네긴에게 온전히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rP4-iloPrc

드디어 오네긴이 타티아나를 찾아와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 시골 마을의 어리고 순진한 처녀의 한낱 가벼운 열병 정도로 여긴 오네긴은 다소 차갑게 타티아나의 연정을 거부한다. 그러면서 너무 순진하게 굴다가 다른 남자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까지 곁들인다. 자신의 진실된 사랑이 한순간에 거부되고 그저 순진하고 어리석은 풋사랑으로 취급되자 수치스러움과 모욕감을 느낀 타티아나는 상처를 받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유진 오네긴' 한 장면

사실 오네긴은 시골 마을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스스로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은근한 자만심이 가득하다. 오네긴은 타티아나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시시하게 느껴지고 함께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타티아나의 영명 축일(기독교도가 자기 세례명과 같은 성인의 이름이 붙은 축일을 축하하는 날) 파티가 열리고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함께 가자고 한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규모의 조용한 파티인 줄 알고 참석한 오네긴은 시끌벅적한 파티 현장에 갇혀 짜증이 나고 이에 함께 오자고 한 렌스키가 원망스러워 그의 애인 올가에게 추파를 던져 렌스키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분노한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둘은 결투까지 오게 된 상황을 후회하면서도 서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결국 렌스키가 죽게 된다. 이후 오네긴은 오랜 세월 해외로 돌아다니며 지내다 세인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고 파티에서 그레민 왕자와 그의 아내가 된 타티아나를 만난다. 

타티아나의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놀라워하던 오네긴은 비로소 자신이 타티아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타티아나에게 편지를 보내 단 둘이 만나게 된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도피하자고 매달린다. 타티아나는 여전히 오네긴을 사랑하지만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오네긴을 떠나간다. 

타티아나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고백했을 때 이미 기회가 있었지만 오네긴은 진실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시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재단하고 대우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만을 우선시했다. 자만에 빠져 순결한 사랑을 놓쳤으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자신만이 대단하고 자신만이 소중하며 자신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젊은 시절의 오네긴은 어리고 어리석었다. 자신의 주변은 시시하고 지루했으며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잘났고 뛰어났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고 더 커다란 무대에 서야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 없었고 자신의 가치관과 성향, 판단만이 중요했다. 

더 큰 세상이라고 다른 것이 없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미 가장 소중한 것들은 떠나고 없었다. 물론 나중에도 기회는 오고 인연은 만들어지겠지만 인생에서는 나중이 되어서야 그 진가를 알고 후회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순간 이전의 자신과는 달라질 것이고 따라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음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후회하는 것도 역시나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다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여유를 갖는 것, 남에게 휘둘리거나 남을 무시하지는 말되 남과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향이자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이전 08화 [5-2] 악의 모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