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의 기록] - 여유들
젊은 시절 바쁠 때에는 취향이든 취미든 그런 것들에 시간과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도 없었고 여건도 되지 않았다. 나의 취향은 무시하면서 무조건 가성비 좋은 것만 산다든지 관심이 가는 물건이나 문화에 시간을 투자하기도 힘이 들었다. 한마디도 몰취미, 무취향의 삶을 살았다.
오십을 바라보면서 재정보다는 시간의 여유가 먼저 찾아온 나에게 가장 좋은 공간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가서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딱히 떠오르거나 벼르고 있던 것도 없던 터라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고민을 했다. 젊은 시절 잠깐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때에는 그저 재미를 좇아 추리소설을 자주 읽었다. 그러다 마흔 즈음 시간적 여유가 찾아왔을 때에는 철학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소설이든 철학이든 나에게는 그저 그 시간을 채워줄 뿐 삶을 변화시키거나 풍요롭게 해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떠한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나의 발길은 어느덧 미술 코너에 멈추었다. 고흐, 마티스, 피카소, 렘브란트, 미켈란젤로...모두 다 한번 쯤은 들어본 이름들이었다. 대표작들은 하나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 저 두꺼운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과 글들은 어떠한 내용일까 궁금해졌다. 하나씩 꺼내 쭈욱 들춰보니 그림들이 꽤나 많았고 처음보는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하는 듯했고 그림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그래, 그림이다. 관심 항목을 그림으로 정하고나자 성격상 이것저것 아무거나 읽을 수가 없었다. 일단 그림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를 다룬 책들을 찾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고대에서부터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입체파, 야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등 그림의 표현 양식은 꽤나 다양했고 이에 더해 화가들의 개성으로 완성된 한 폭의 그림은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로 엄청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츰 그림의 역사가 정리가 되는 듯하자 본격적으로 화가별 탐구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잘 알려진 화가들은 물론이고 다소 생소한 화가들까지 서가를 빼곡히 채운 책들을 보고 있자니 감히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흥미가 이미 높아진 상태였기에 오히려 저 많은 책들을 한권씩 한권씩 읽어나갈 생각을 하니 즐겁기도 했다. 유명한 화가들은 한 화가당 관련 책이 열권이 훌쩍 넘었고 일단 화가별로 책이라도 있다고 하면 책 한권 당 그 안에 담긴 그림과 내용은 역사, 문화, 사회, 경제, 정치, 세계사, 지리 등 방대함과 깊이가 남달랐다.
과연 그림은 이와 얽힌 이야기가 엄청날 뿐 아니라 그림이 주는 정서적 풍요를 생각하면 그 기능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취향도 무시할 수 없어 자꾸만 눈이 가는 그림이 있고 자꾸만 마음이 가는 화가가 있는데 그러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줄도 몰랐다.
이렇게 책으로만 계속해서 그림을 보고 있자니 실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일단 주변에 큰 도시가 있으면 그곳에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무조건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분명 예전에도 왔던 곳인데 그림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나서 다시 찾으니 이런 그림이 여기에 있었나 새삼 반갑고 기뻤다.
따라서 오십 즈음에 유럽 여행을 처음 했을 때 말로만 듣던 그곳에서 책으로만 보던 그림들을 직접 보게 된 그 흥분과 설렘은 말해 무엇하랴. 더구나 가뭄에 콩나듯 한 두 작품이 고작이었던 유명 화가들이 작품이 다수로 나란히 때로는 한 방을 다 채우고 심지어 다음 방에도 이어지는 것을 목도하고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탈리아 피렌체의 쁘띠 팔레를 방문했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 작품들을 자신의 대저택에 걸어놓은 이 박물관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유명 화가들의 그림들이 방에서 방으로 꼬리를 물로 늘어지는 경이로움은 물론 그 많은 그림들이 천장에서 눈 높이에 이르기까지 벽을 가득 메우며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게 걸려있는 덤덤함에서 그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들이 방에 들어선 순간 눈 앞에 나타났을 때의 감탄과 그 유명한 루벤스의 풍경화가 잘 보이지도 않는 천정 가까이에 주욱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 시간이 지나자 다른 곳에서는 한 두 개 보기도 힘들었던 그림들이 연이어 나타남에 따라 또 '티치아노의 그림이네'라며 익숙한 듯 지나치는 나 자신이 그저 다 모두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림이 좋은 것이 책으로 봐도 충분히 좋을 뿐 아니라 직접 보면 더 좋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한번 봤다고 다음에 봤을 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 즉 볼 때마다 새롭다는 것과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 또한 직접 찾아가서 볼려고 한다면 갈 곳이 한 두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 퍼져 있으니 여행 갈 곳이 많아진다는 것, 어딜 가든 맘만 먹으면 근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등 무궁무진하다. 해도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그림으로의 탐구와 여정, 이보다 더 좋은 오십의 취미가 있으려나 싶다. 오십의 나이에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즐길 거리가 생겼으니 참으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