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의 기록] - 여유들
술이라면 취하려고 들이 붓거나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마신 기억밖에 없다보니 술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누구는 그러다 정이 들거나 인이 박혀 술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했지만 나는 알코올의 향이 너무 싫었고 끝도 없이 들이켜 취하기도 전에 배가 부르는 것이 싫었고 술마신 다음날 무거운 몸과 쓰리고 미식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러다보니 자발적으로는 술을 마실 일이 없었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술자리가 좋아서 마시는 사람들도 많지만 술을 마셔야만 좋은 자리라면 굳이 사양이었다. 물론 좋은 자리에서 술 한두잔 마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술은 그저 좋은 자리에 곁들이는 것이지 그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는 역시나 나이에 있었다. 음식을 가려 먹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게 되자 함께 곁들여 먹으면 좋은 술로 와인이 떠올랐다. 한 두잔씩 먹는 것은 몸에도 그리 큰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수가 높지 않은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이것저것 마시다보니 특히 품종별로 차이가 많이 느껴졌고 자연스럽게 나에게 맞는 와인을 찾게 됐다.
점점 더 와인을 즐기다보니 와인이 품종은 물론 지역, 양조장 등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이러한 차이는 화이트 와인보다는 레드 와인에서 더욱 다양하고 확연했다. 마침 레드 와인이 건강에 잇점이 있다는 점도 한 몫 거들어 결국은 레드 와인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느새 레드 와인 중에서도 좋아하는 품종과 지역이 생겼다. 더 나아가 양조장과 브랜드에 따라 맛이 다르고 심지어 년도별도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지적 호기심도 불러 일으키기에도 충분했다. 처음에는 레이블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고 어느 와인을 사야할지도 몰랐다. 이것저것 찾아보며 와인에 대한 지식을 익히려고 했지만 쓰는 용어도 생소하고 외래어도 많아 처음엔 듣고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맛이나 향도 제각각이었다. 사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으로 퉁치면 그게 그거 같지만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분류하고 파고들다 보면 어느 한 병도 같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와인도 처음 마실 때와 다음날 마실 때 달랐고 디캔팅 여부, 더 나아가 마시는 잔에 따라서도 음미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고 어느 음식과 먹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니 이것은 도저히 한 번에 마스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나에게 맞는 와인을 찾아가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이렇게 술 하나로도 많은 대화가 가능하고 많은 공부가 가능하며 직접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하니 평생 즐길 만한 취미로 이만한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비싼 와인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수 많은 와인 중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와인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이를 찾아가고 음미하고 즐기는 것이 가능하니 누구든 언제든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따라서 틈틈이 공부하고 다양하게 시도해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 쉽게 지루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구하기에 제격이었다. 최근 저속노화라는 컨셉으로 진료는 물론 출판, 강연, 유트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희원 교수에 따르면 술은 단 한잔도 독이라고 하지만 와인이 주는 다양한 혜택들을 생각하면 조금씩은 즐기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아닌가 생각된다. 와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건강적 혜택은 물론 식사 시간을 풍요롭게 하고 지적 영역을 자극하며 현장 체험 등 신체적 활동까지 연결되니 노년에 즐길 만한 취미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당분간은 이렇듯 오묘하고 섬세하고 복잡한 와인의 세계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설사 그것이 약간의 해가 된다 하더라고 이를 뛰어넘는 다양한 혜택들이 있으니 말이다. 붉고 쓴 액체가 풍기는 향기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혀 끝을 자극하고 입안에 남는 맛이 씁쓸함을 풍길지언정 그 한모금이 다음 한모금을 부르는 매력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좋고 싫음으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것이 어쩌면 와인은 인생과 닮지 않았나 싶다. 다음 한모금을 위하여, 다음 챕터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