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조이스

시원시원하고 귀여운 J할머니

by 탐구와여정

J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식물과 꽃을 심는 액티비티 활동에서였다. 대부분 졸거나 흥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유독 J할머니만 눈이 초롱초롱했다. 휠체어를 탄 J할머니는 왼손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손가락을 뻣뻣이 펼치고 있는 채였다. 왼쪽 입술도 살짝 올라가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왼쪽에 마비가 있는 듯했다. 거의 유일하게 활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대화가 가능하다보니 할머니에게 자주 말을 걸게 되었다.

"가드닝 활동을 좋아하세요?" "그럼, 좋아하지" "예전에 집에서 정원을 잘 가꾸셨나요?" "응, 예쁜 꽃들을 심었지. 우리 정원은 아주 아름다웠어" 똑같은 질문을 다른 노인들에게 하면 대부분은 반응이 없거나 기껏해야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웃어주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한두번 반복하면 금새 지치거나 지루한지 졸거나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J할머니는 달랐다.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하면 활짝 웃음을 지었고 어떤 꽃을 좋아하냐, 무슨 색이 좋으냐 등 모든 질문에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해주었다. 그 와중에 의사 표현도 확실해서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고 분명히 표현했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심는 활동을 하면서 진행자나 다른 노인들에게도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고 옆에 가서 말을 걸면 느리지만 확실하게 대답을 잘했다. 다른 노인들과도 골고루 대화를 나누고 활동에 참여하도록 격려도 하고 챙기기도 했지만 J할머니에게 다가갈 쯤에는 할머니가 이번에는 어떤 대답을 할 지 궁금해져서 벌써부터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러다 다음번에 갔더니 이마와 볼 등 얼굴에 커다란 상처와 멍이 들어있기에 깜짝 놀라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 어쩌다 이리 됐는지 물었다. 그러자 얼굴을 찡그리며 엄청 아픈 표정을 짓더니 "침대에서 일어나다 넘어졌어. 침대 옆 탁자에 이마를 부딪치며 바닥으로 넘어졌어. 아직도 아파"라는 것이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조심해야 해요. 언제나요. 다음부터는 꼭 조심하세요"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랬더니 "응, 언제나 조심해야지,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할거야"라고 말하고는 얼굴에 활짝 웃음을 보였다. 나의 신신당부를 그대로 따라 말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동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대답을 꽤나 구체적으로 잘 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아무래도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함께 저쪽 방으로 가서 이야기 좀 나누시겠어요? 저와 함께 가실래요?" 했더니 할머니는 "응"이라고 말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휠체어에 탄 할머니를 데리고 긴 복도를 지나 액티비티 룸으로 갔다. 아직 활동이 시작되기 전이라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아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 받은 뒤 물었다.

"여기가 좋으세요?" "응, 좋아" "왜요?" "안전하고, 사람들도 좋아. 근데 나쁜 사람들도 있어. 괴롭히는 사람들. 주사 놓고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 처음에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시설에 대한 안좋은 인식과 편견으로 인해 혹시나 나쁜 직원들이 있거나 다른 노인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주사 이야기를 듣고는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를 도와주려고 그리고 치료해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여기에는 얼마나 계셨어요?" "4년 정도" "집에 가고 싶으세요?" "집에 가고 싶지. 이 근처야. 내일 가고 싶어. 나는 아파서 여기 있는 거야. 집에 우리 엄마가 있어. 난 결혼은 안했어. 애는 둘인데 지금은 잃어버렸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의 상태와 바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기본적인 가족 관계도 예상해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사라진 기억들과 혼란스러운 시간감각으로 인해 뒤섞인 기억과 시간들, 그 안에서 여전히 붙잡고 있는 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 번에 만났을 때 또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역시나 할머니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여기가 좋으세요? "응, 근데 집 같지는 않아. 언젠가 집에 가고 싶어" "다른 가족들은 어디에 있어요?" "애가 둘 있는데 캐스터빌에 살아" "지금 무얼 하고 싶으세요?" "산책을 하고 싶어. 나는 음식도 좋아해. 어느 음식이든 잘 만드는데 볶음밥을 아주 잘하지. 여기에는 3개월 정도 있었는데 몇 개월 더 머문 뒤에 집에 갈 거야. 우리 애기랑 살 거야" "애기가 몇 살인데요?" "6개월" "할머니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3살"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만난 할머니는 평소와 달리 약간 어둡고 경계하는 눈초리가 심했다. 다시 한번 인터뷰를 요청한 뒤 이것저것 물었다. "티셔츠가 아주 이쁘네요. 누가 사줬어요?"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거야. 엄마는 돌아가셨어" "집에 가고 싶으세요?" "아니, 집에서 링거를 너무 많이 맞아서 무지 아팠어" "난 이곳을 좋아하지 않지만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아" "난 여기에 4개월 있었어. 내가 뭘 훔쳤다고 말하는데 나는 아무 것도 훔치지 않았어. 여긴 감옥이야. 새들이 너무 시끄러워. 좀 조용했으면 좋겠어" "오늘 아침에는 뭘 하고 싶으세요?" "다른 곳에 가고 싶어. 동물원" "가족에게 가고 싶으세요? 집이 어디에요?" "미국" "가족들은요?" "집에는 아무도 없어.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남편도 죽었어. 아이들은 둘 있는데 딸 하나, 아들 하나야"

아무래도 할머니의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가족에 대한 기억은 그나마 선명하지만 혼란스러운 기억과 불안한 마음이 느껴졌다. 언제나 주변을 살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할머니는 최근 상태가 더 안 좋아진 어떤 할아버지로 인해 매우 불안해 보였다. 그 할아버지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돌아다니며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하고 그것이 좌절될 때마다 불평을 하고 험한 말을 하면서 제지하는 직원을 때리려고도 했다. 그 할아버지로 인해 할머니의 평온한 일상이 깨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을 곧잘 하고 간간히 웃음도 지었다. 안쓰럽기도 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최대한 밝게 웃어주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혼란한 와중에도 무언가 확실한 한가지라도 있으면 낫지 않을까. 그것이 무엇일까. 가까운 가족에게 의존할 수도 없고 집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인데다 가족이나 집에 대해서 위안을 받을 만한 행복한 기억도 오늘은 그닥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이 아닐까. 과거의 자신도 아닌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 모든 상황을 견디며 그 와중에도 지키고 싶은 단 하나,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할머니에게 자신의 얼굴을 그려보겠냐고 물었다. 뭐든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할머니여서 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거울을 보여주며 물었다. "할머니 얼굴이 어때 보이세요?" "늙어보이네" "할머니 자신의 얼굴이 좋으세요?" "그럭저럭" "할머니 자신이 좋으세요?" "그럼, 물론이지" 할머니는 손에 힘도 없는 상태였지만 크레용을 들고 나름 시원하게 얼굴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얼굴형을 그리고 웃는 형태의 눈을 그리고 코를 그리는 듯하더니 한참을 그곳에 머물러 끄적이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깨우자 다시 코 부분으로 손이 갔다. 입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여기 있잖아" 하면서 코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턱 부분으로 크레용을 가져가 끄적거렸다. "그건 뭐예요?" "입" 마지막으로 머리를 천천히 머리를 그려넣으면서도 중간에 또 졸린 듯 꾸벅꾸벅했다. 그렇게 간신히 자화상을 끝낸 뒤 한 켠에 이름을 적으라고 했더니 놀랍게도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적어내려가는 것이었다.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조이스" "네 맞아요 할머니. 조이스, 바로 할머니 이름이에요." 할머니의 얼굴에는 만족스럽고 행복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주변이 혼란스럽고 불안한 와중에도, 가족에 대한 기억마저도 흐릿해져가는 가운데도, 자신이 좋다고 말하며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써내려가는 할머니를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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