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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Feb 15. 2019

디즈니의 ZOOm out
<주토피아>와 젠더갈등.

주토피아(2016) 감상평.


 주토피아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며 생긴 의문. 저렇게 다른 특성과 습성을 지닌 동물 종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일까? 이 질문은 프레임 밖을 빠져나와 현실로 연결된다. 영화 속 우화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다. 다양한 동물(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고, 하나가 되어 평화, 평등, 박애를 실현해야만 하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그 단어 자체의 모순처럼 (그리스어의 ou(없다), topos(장소)의 조합인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또 다른 질문이 차올랐다. 다양성이 화합된 왕국 ‘주토피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디즈니의 ZOOM OUT>     


 편견 타파와 평등 추구는 모두에게 익숙하다. 음악, 에세이, 광고, 특히나 ‘디즈니’ 영화에서는 항상 이렇게 외쳐댄다. ‘자기 자신을 믿어라’, ‘타인의 다름을 존중해라.’,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꿈을 포기하지 마라.’ 뻔하다고 생각했다. 초반부부터 쏟아져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입바른 말을 들었을 때 역시나 했다. ‘그래~ 그렇게 꿈을 이루고 행복하게 세계 평화가 이뤄지겠지. 축하해!’ 하지만 영화의 3분의 2지점을 지날 때 주토피아는 보기 좋게 내 뒤통수를 쳤다. 그 신선한 충격의 주체는 ‘서사의 반전’이 아닌 ‘시선의 반전’이었다.      


 주인공 토끼 ‘주디 홉스’는 전형적인 디즈니의 서사를 따라간다. 신체적 특성이라는 결핍을 극복하고 조력자 닉 와일드를 만나 악의 무리를 처단하며 꿈을 이뤄낸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주디라는 ‘개인’의 성장은 완성된다. 하지만 <주토피아>의 진면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디즈니는 이처럼 주인공 ‘개인’에게 많은 부분 초점을 맞췄다. 나는 그동안 디즈니가 추구했던 이야기 스타일이 제목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볼트’, ‘라푼젤’, ‘라이온킹’, ‘니모를 찾아서’, ‘라따뚜이’, ‘주먹왕 랄프’) 이에 반해 이 영화의 제목이 ‘주토피아’, 즉 세계관을 지칭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개인에서 사회로의 시선의 확장. 디즈니는 이제 사회와 현실을 반영하는 보다 넓은 화각의 광각렌즈를 만들어낸 듯싶다.     



<젠더 갈등>     


 그렇다면 이 영화가 다루는 사회 갈등은 무엇인가? 보복 정치, 허례의식, 인종차별 등의 여러 갈등이 영화에 담겨 있지만 그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읽혔던 것은 젠더 갈등이었다.

앞에서 말한 뒤통수를 맞은 순간부터 이러한 해석이 시작됐다. 주디는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며 육식 동물들이 원시 시대의 맹수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게 되고 우연히 이를 언론에 알리게 된다. 이 계기로 주토피아에는 육식 동물들에 대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고 이는 곧바로  차별로 이어진다. 육식동물이 과거에 초식동물들 위에 군림, 도륙했다는 역사는 이러한 차별에 힘을 실어준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상호작용했던 여러 종들은 이제 이분법의 논리 안에서 오직 잠정적 가해자(육식)와 잠정적 피해자(초식)로 구분된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이하고 있는 젠더 갈등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서로 다른 성별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와 비난이 난무하고 있다. 혐오를 위한 혐오, 늘어나는 혐오의 총량.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개인들은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 혹은 ‘소수자’라는 삼분법에 의해 프레임이 씌워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토피아의 결말과 같은 사회의 유토피아를 이륙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

 

아쉽게도 현실은 해독제를 만들어 주입시키는 영화처럼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분노와 혐오의 해독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심화된 판단이라는 정신적 성숙이 필요하다.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위해 메시지를 던진다. 아주 간단 명료하지만 우리가 쉽게 실천 할 수 없는 것.   

  

Look inside yourself and recognize that change starts with you. 
It starts with me. It starts with all of us.
“내면을 들여다보면 변화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변화의 시작은 나에요. 그리고 우리 모두죠.”     


 우리는 먼저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세워야 한다. 타인의 말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유토피아 말이다.(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곳’의 의미는 형이상학적인 우리의 마음을 나타낸 말이 아닐까? )

이러한 유토피아의 필요성은 소비에트 몽타주의 대표작 <전함 포템킨>의 전언을 떠올리게 한다.

"전체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전체"

이처럼 개개인이 불필요한 분노와 혐오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바른 것과 잘못 된 것을 수렴해 하나의 정(正으)로 유토피아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들의 DNA를 언급하며 생물학적으로 비판하는 장면은 나치의 선민사상을 떠올리게 하고 시장이 된 양이 ‘공포’가 정치의 동력이라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하는 장면은 메카시즘의 광풍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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