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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우 Nov 27. 2018

트랜디를 넘어선 진부함. 양산형 독립영화. <영주>

감상적인 감상평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영주>는 트렌디하다.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이 서사를 이끌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죄와 벌 사이의 딜레마를 다룬다. 그 외에는 다른 표현을 써야할 듯 하다. 진부하다. 인물들이 지닌 결핍과 역할, 연출 방식까지도 진부하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뒤 남겨진 불우한 십대 소년들, 방황하는 동생과 고군분투하는 누나. 피해자가 가해자와 정을 주고 받으며 죄의식과 용서를 주제로 하는 영화들. <영주>는 최근 몇 년간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하나의 경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 영화 다양성의 최후의 보루라고 여겨졌던 독립영화 시장에서도 양산형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영주>만의 장면, 감정, 인물이 없었다. 곱씹어볼만한 해석의 여지도 적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알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상을 당해본 적도 피해자로써 가해자와 포옹하며 정을 나눈적도 없다. 단지 권만기 감독의 <초능력자>로 자본의 벽에 부딪히는 소년 가장의 고단한 삶을, 다르덴 형제의 <아들>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주고 받는 사랑 그로 인해 발생하는 딜레마를, 이 외에 비슷한 설정을 가진 영화들에서 이와 같은 인물과 상황을 경험했을 뿐이다. 이러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영주>는 그와 비슷한 수준 혹은 아래에 위치했다.


 특히나 '죽음으로 얽힌 피해자가 가해자와 밀접하게 생활하며 정을 주고 받는다'는 설정, 그에 따라오는 딜레마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않았다. 핵심 플롯의 진부함에 더해 연출적인 문제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감독은 씨네 21와의 인터뷰에서  "향숙은 영주를 보고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선뜻 마음을 줄 수 있었다." 라고 인물설정을 말했다. 하지만 향숙의 호의는 지나치게 과정되어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했다. 처음 본 알바생에게 옷을 사주고 함께 떡볶이를 먹고 선의로 거액의 금액을 선뜻 건네는 향숙의 행동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좋아하게 된다.'라는 메인 이벤트를 위한 인위적인 설정으로 느껴졌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단연코 결말이다. 딜레마로 끙끙 곯던 주인공 '영주'는 클라이막스를 경험하고 자살을 하기위해 (또 진부하게..) 한강 대교를 찾는다. 자살을 망설이는 영주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주가 자살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만한 감정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 

역시나, 예상대로 영주는 어디서 얻은 것인지 모를 한줄기의 희망, 혹은 죽음의 공포를 가슴에 안고 먹먹히 다리를 걸어간다. 영화는 트렌디한 풀샷으로 그런 영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성장'하는 이들에 대한 응원이다, 라고 말한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엔딩씬에는 '성장'하기 위해 보류된 선택에 대한 답답함만 남겨진다.

이건 관객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열린 결말이 아닌, 관객들에게 엔딩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결말일 뿐이다.


소재나 설정의 반복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모든 창작물은 다른 창작물의 영향을 받기 때문. 하지만 영화의 정체성마저 반복되는 영화들이 주류가 되면 다양성이 무너지게 된다. 한시 빨리 다양한 작가주의 영화들이 독립영화의 생기를 불어넣어줬음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이 나비효과가 되어 2000년도 초반의 코리안 뉴 웨이브를 다시 한 번 일으켰으면 하는 조금 더 큰 바람이다.


P.s.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했다.





 

영주 (Youngju,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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