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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빌 언덕

 나는 그에게 전생에 지은  빚을 갚았다

한 늙은 사내가 냉기 서린 지하철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 엄동설한에 신발도 없이  맨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는걸까? 그의 모습은  울며불며 떼를 쓰다가 엎어져 잠이든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고 전쟁통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차갑다 못해 칼로 생 살을 베일 듯 시린  시멘트 바닥을 의지하고 엎드려 있었다.  방 한 칸, 이 불 한 채  심지어 신발도 없는 그에게 비빌 언덕이라고는 냉기 서린  시멘트 바닥이  유일한  것처럼 보였다.


10년 전 나는 가난한 여행자의 신분으로 방콕의 한 호텔 로비에 앉아있었다.

 눈만 붙이면 될 텐데 지불해야 할 그놈의 방값이 너무 아까웠던 나는 싸구려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밤늦게 적당한 규모의 호텔로 들어가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내가 앉은 좌 측으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후론트 데스크가 있었다. 마주 보이는 구도가 아니라서 안심이다.  이 소파에서 하룻밤을 어떻게 견뎌보자. 이럴 땐 최대한 있어 보이는 게 유리하다. 옷매무새가 신경이 쓰여 배낭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좋은 게 들어있을리 만무했지만 뒤적여보니  다행히 스카프가 한 장이 손에 잡혔다. 그걸 두르니 어느 정도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스카프 한 장으로는 부족하여 책 을 꺼내 읽으며 점잖게 앉아있었다. 누가 봐도 방문객이나 투숙객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완벽했다.  밤 10시가 지나니 눈치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벌써부터 자기 시작하면 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예의 상냥한 미소까지 지으며 나를 쫓아낼지도 모르니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밤 12시까지 버티고 앉아 있으면 암묵적 승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여행 피로로 눈이 자꾸 감겼지만 버티고 버텼다. 드디어 12시가 되었다.  내 쪽에서는 두세 시간 동안 앉아있으면서 나갈 의사가 없음을 몸으로 말해준 상태였고, 그쪽에서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을 테지만 아무런 제재도 없는 걸 보니  그냥 그렇게 있어도 눈감아 주겠다는 사인을 보내온 거나 다름없었다.  사람을 기다리듯 앉아있던 기다림 모드에서. 데스크의 눈치를 살피며 취침 모드로 자세를 바꾸어 보았다. 두세 시간의 학습을 통해  쫓아낼 리 없다는 확신 아닌 확신이 있었기에 거리낌은 없었다. 소파 팔걸이와 등받이를 십분 활용해 나름의 체면을 차린 자세로 눈을 감았다. 가난은 참 무서운 거였다. 나는 그렇게 앉은 채로 잠을 잤다. 자세를 바꾸느라 여러 번 깨었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다 보니 약간의 긴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주변 소음이 계속해서 들렸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분명히 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 날 배낭 한가득 가난을 쑤셔 넣은 채로  태국 북부 지방 치앙라이로 이동했고 '나를 죽이겠다' 혹은 '나를 살리겠다'는 각오로 극기 훈련하듯  일주일 동안 도보여행을 했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걷고 또 걸었다. 혼자 몸부림치듯 그렇게 처절하게 걸었던 이유는 나 역시 비빌 언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처지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늙은 사내에 비하면 나는 그때조차도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도둑잠을 잤을지언정  늙은 사내처럼  차가운 바닥이 유일한 비빌 언덕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풍요의 시간들이었다.

 


늙은 사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를 살폈다.  

술을 한잔 했을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발도 없이 저렇게 맨바닥에 고꾸라진 채 나자빠져 있을 리 없다.  내 수중엔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지폐 4종이 모두 있었다. 어떤 것을 고를까 생각했다. 그가 맨 정신이라면 오만 원권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5만 원에 대한 운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고 근처 의자에 앉아 나를 살피는 같은 부류의 사내들에게 뺏기고도 남겠다.  만 원짜리 지폐를 주면 그는 분명 뜨근한 국물과 함께 술 한 잔 기울 일게 뻔해 보였다. 나는 고민을 마치고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앞쪽으로 가보니 얼굴 반쪽은 바닥에 대고 있고 그의  두 손은 쓸모없는 것처럼 매달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오천 원짜리 지폐를 그의 손에 쥐어 주면서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씻지 않아 더러워진 얼굴에 콧물까지 흘러내려 있었다.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쓰러져 있는  들짐승 같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뜨는가 싶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 되는 눈빛으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5천 원권 지폐를 힘없이 쳐다보며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눈동자를 움직여 나를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나를 봤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겁먹은 면상을 내 보였을 것이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므로 그런 실례를 하지는 않았으니 그에게도 나에게도 다행이었다.  


일 때문에 서울 가는 일이 아니면 대전역에 갈 일이 없는 나다. 오늘은 남편의 심부름으로 아침 일찍 움직였던 것이다. 아마도 전생의 어느 생 중에 남편과 나는 그 늙은 사내에게  쥐어준 딱 그만큼의 빛을 고 있었나 보다. 이자를 얹어 주지 못했으니 다 갚은 건 아닐 것이다.


 뜨끈한 국물 한사발 들이키고
부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시기를...






대전 어반스케치 리더 소형쌤이 본문의 그림을 그려주셨다. 마침 갤러리에 오셨길래 그림 부탁을 드리고나서 매우.간.단.하.게.만. 설명했는데 내가 본것보다 더 정확히(?)  빛의 속도로 그려주셨다.

천재다. 천재!

소형쌤 브런치 >  https://brunch.co.kr/@minisoso#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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