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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담쟁이 Oct 24. 2015

내 아이들은.....

남기고 싶은 유산


아침저녁으로 날이 차다. 9월도 되기 전에 보일러를 켜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이 가장 괴로움을 겪는 계절, 바로 이런 환절기가 아닐까. 가을은 아름답지만 몸은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다. 감기에 걸린 지도 벌써 여러 날, 그래도 이제 막바지인지 오늘은 두통도 거의 느끼지 못하겠고 음식을 삼킬 때의 거북함도 훨씬 덜하다. 컴퓨터를 켜기 귀찮아서 작은 기기에 눈을 집중하고 오랜만에 글쓰기를 한다. 쓰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따뜻한 침대를 떠나기는 싫다. 이런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

 아프다는 핑계로 빨래를 건너뛴 지도 몇 번인지 세탁기에는 빨랫감이 그득하다. 지저분한 물건들은 당장 보기 싫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뒤쪽 베란다로 모두 몰아넣었다. 나중에 정리하지 뭐.


주말에 집에 온 딸이 냄비에 죽을 가득 끓여놓았다. 뚜껑을 열어보니 버섯이랑 당근, 시금치 등을 잘게 썰어 넣어서 형형색색 무척 예쁘다. 저 녀석은 부엌일도 척척 잘하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 씀씀이도 따뜻하다. 나를 닮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며칠 전, 누군가가 나에게 자식에게 남기고 싶은 유산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의 단점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글을 쓰다보면 뭔가가 정리되겠지.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하는 빈도 높은 단어를 떠올려 보자. 이를테면 ‘열정’이니 ‘추진력’이니 ‘끈기’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물려주고 싶은가? 그런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어떤 것은 지나치게 무모하고 어떤 것은 너무 삭막하며 어떤 것은 메마르기 짝이 없다. 사람들이 나의 장점이라고 읊었던 것들이 왜 이렇게 나의 자식에게는 물려주기 싫은 것으로 와 닿는 것일까.


요즘 텔레비전을 켜면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에 등장하는 대기업 총수가 있다. 사람들은 그의 처신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권력 앞에서는 자식도 필요 없다느니 혹은 심신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하면서 나름대로의 추측성 발언을 쏟아낸다. 물러섬의 시기를 놓친 그는 과거의 영욕에 머물러 자식들의 구심점이 되지 못한 탓에 기업의 이미지를 저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젊은 사람들의 무모함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이 든 사람들의 물러남과 타협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무모함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사람은 없을 테지. 나는 누구보다도 무모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니까. 또한 물러남과 타협을 말한다고 해서 허물이 되지는 않을 테지. 나도 현실적으로 점점 가까워오는 퇴직을 생각하며 인생 2막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므로. 결국 중요한 것은 왼쪽이든 오른 쪽이든, 장점이든 단점이든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은 쳐내어야할 잔가지가 아닐까. 나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하겠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누누이 부탁하고 싶은 말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이에 맞는 생각과 태도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정신연령’이라는 말이 생긴 것일까. 사람들은 긍정적인 태도로 인생을 살라고 조언하지만 나는 내 자식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부정적인 태도가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도 있고, 긍정적인 태도가 때로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으로 살게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내 아이들이 자신이 속해있는 곳, 그것이 장소가 되었든 연령이 되었든 간에 그 속에서 적당한 수평을 찾아내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자식들이 세상에 대하여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른 판단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원칙’과 ‘융통성’이 있다. 한쪽에서는 ‘원칙’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융통성’을 이야기한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데 어리석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과연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인가? 때로는 그 순간에 분명히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땅을 치며 후회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경험으로 남았던 적은 없는가. 승승장구하던 젊은 시절을 되새기며 쓸쓸하고 초라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나는 내 자식들이 지나치게 자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살지 않기를 바란다. 주어진 순간순간마다 때론 길게, 때로는 짧게 앞날을 내다보며 올바른 판단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바란다.


나는 내 아이들이 인생을 살면서 우정을 쌓기 바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폭넓은 인간관계를 이야기하고, 또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이 성격이 좋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내 아이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나 기질이 달라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면서 사색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어느 수필가의 글에 나오는 첫 문장처럼 나는 내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나면 흉허물 없이 찾아가서 말을 나누어도 말이 새어나감을 걱정하지 않을 친구' 두세 명 정도는 꼭 사귀었으면 좋겠다. 그 바탕위에 내성적인 성향의 딸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인생을 즐기기 바라고, 외향적인 성격의 아들은 보다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인생을 즐기기 바란다.


결국 유산이야기는 내 자식이 인생을 ‘이렇게 살면 좋겠다’하는 식으로 결론을 맺게 되었다. 쓰다가 보니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정리한 셈이 되었는데 어쨌든 나는 내 아이들이 인생을 살면서 행복을 찾아내는 아이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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