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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담쟁이 May 29. 2016

염색약 앞에서


받아들이자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을까? 초연하기는 힘들었고 굴복은 쉬웠다. 나이 많은 연예인들은 변하지 않는 젊음으로 끊임없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세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백발이 될지도 모른다는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독하다는 염색약을 일체의 거부감도 없이 머리 위에 얹은 날,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훨씬 이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다. 포장된 자신의 모습을 진실이라 믿으며 사람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나 역시 그들처럼 착각이 만들어준 당당함의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염색의 역사 어언 이십 년, 나는 이제 포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탈모때문만은 아니었다. 염색과 동시에 자라나는 하얀 그림자는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가르쳐 주는 듯 했다. 게다가 그 번거러움이라니. 내 마음만 바꾸면 될 것을 이런 지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다니.


젊음의 묘약 탓인지 방부제 미모를 자랑하던 브라운관 그녀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순리를 택한 사람들은 세월이 만들어낸 주름으로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 세상 이치를 되돌릴 수는 없는 거야." 나는 하얗게 새로 난 뿌리쪽 머리카락을 보면서 이제 받아 들여야할 때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심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앉았다.


아아.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와 염색약 앞에 앉았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저 여인은 정직한 내 모습이며 그런대로 봐줄만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십 년은 늙어 보이는 그녀가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한 것일까? 보는 사람마다 폭풍같은 조언의 말을 아낌없이 퍼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적어도 이 순간 수용과 거부는 여소야대 시대의 국회의결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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