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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이 이지샘 Apr 03. 2024

나는 언어치료사, 여기는 언어치료실

언어치료실이라는 장소



갈등은 문제가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기회다.

-마하트마 간디-




"언어치료사가 언어발달이 느린 아이를 만나 언어치료를 진행한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당신은 어떤 모습이 상상되는가?


언어치료실을 방문한 적이 없는 분들을 위해 치료실을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

언어치료실은 대부분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들과 아이의 적절한 '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단어 카드들, 학습교구들이 교구장에 채워져 있다.

그리고 치료사와 아이가 함께 앉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도록 책상의자가 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치료사와 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 장난감을 함께 쳐다보고 있는 모습.

혹은 치료사가 내미는 학습자료를 아이가 쳐다보며 집중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치료사의 모습.


아이와 함께 진행하는 치료의 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라면 아마도 저런 모습이겠다.

잠깐. 저런 모습 만일까?


지금 이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인터넷 창에 '언어치료'라고 검색하여 이미지들을 몇 개만 넘겨보기 바란다. 글을 쓰면서 나는 방금 말한 대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다. 웃고 있는 아이와 선생님의 이미지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안 그랬다.

내가 치료하는 치료실에서는 저 인터넷 속 사진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 게 손에 꼽았다.

한 명의 아이를 센터 치료실에서 만나는 시간은 40분가량이다.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30분가량이었다. 아이가 치료실에 입실하고, 선생님은 웃으며 아이에게 의자에 '착석'을 권한다.


여기서부터.


'착석'부터가 난관의 시작인 아이들이 있었다.

앉으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고, 앉아야 할 이유가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치료실에 입실하면 장난감이 있는 교구장으로 돌진하는 아이, 잠깐 앉았다가 일어나서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아이, 앉기는 했는데 준비된 치료자료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손만 쳐다보며 손을 팔랑거리는 아이.


아이에게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치료의 첫 번째 과제였다.






우리가 가는 장소들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장소가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우리는 한다. 화장실이라는 곳은 볼일을 보거나 씻기 위한 목적이 있을 때 들어가는 곳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에 맞는 일을 수행하고 나온다. 영화관은 영화를 보러 가는 곳이다. 영화관에 가면 우리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고 나온다. 도서관도, 놀이터도, 공원도. 다양한 장소들에서 우리는 그 장소에 대한 일련의 목적이나 어울리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


언어치료실은 아이의 언어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찾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아이를 데리고 오는 보호자는 그 목적을 알고 있지만 정작 대상자인 아이는 그걸 잘 모르거나, 혹은 알더라도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치료실을 가야겠다는 동기가 생겨서, 필요성을 느껴서 제 발로 걸어오는 아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이의 발달을 걱정하게 된 어머님이 아이의 손을 붙잡고 데리고 오게 된다.


처음 온 아이는 '이곳이 뭐 하는 곳이지?' 하며 들어오기도 하고, 여러 번 치료실을 경험한 아이는 몇 달의 경험이 쌓여가며 이곳을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곳' 혹은 '선생님이 어려운 무언가를 자꾸 시켜서 짜증이 나는 곳' 등으로 인지하기도 한다.


료를 하던 어느 날, 나는 이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언어치료사인 내가 매일 출근해서 입실하는 내 치료실.

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만나는 곳이며,

내가 소명감을 갖고 일을 하는 곳이고,

이 작은 방 안에서 만나게 될 무수히 많은 아이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아니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의사소통의 방식이 편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아이 앞에 떡 하니 앉아 아이에게 지금보다 어려울 수 있는 과제들을 제시하기 시작하니, 아이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을 터.


엄마의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알 턱이 없다.

이 하나의 활동이 쌓여 아이의 보다 발전된 언어능력을 도와주기 위해 앞에서 선생님이 애를 쓰고 있다는 것도 아이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나와 엄마는 너무너무 중요한 시기이고 하나라도 더 받아들여 배웠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이런 동기가 어른만큼 형성되어있지 않을 때. 이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참 많이 고민했던 지난 날들.






정답은 없었지만 계속 고민을 해 보았다.

'치료실'. 치료실의 첫 번째 목적은, 그리고 내가 치료실에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첫 번째 중재는 아이가 치료실을 온전히 '치료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다양하고 보다 발전된 즐거움을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언어치료실이기에 보다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경험의 짜릿함을 아이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고, 자신이 보다 발전된 언어를 썼을 때 선생님과 진짜 소통을 했다는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지금 사용하는 미성숙한 방법보다 훨씬 더 용인된 방법을 쓰면 생활에서 소통을 통해 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보다 나은 의사소통의 행복과 즐거움을 알려주는 게 이 방의, 이 장소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첫걸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규칙을 내세우며 치료사의 규칙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이 입장에서는 처음 선생님이 몇 가지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놀아주다 보면 여기서 즐겁게 '놀고만'싶어 지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놀이 상황에서 아이에게 보다 발전된 언어를 표현하도록 요구하게 되는데, 아이는 그때 선생님이 자신에게 규칙을 제시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면 역시나 크고 작은 갈등상황이 뒤따른다.


이런 것이다. 아이는 치료실에 들어와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자기 혼자놀이에만 열중하고 싶은데, 치료사는 단어 말하기를 잘하고 나서 놀이시간을 갖자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싫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울음이나 떼, 무시 등의 갈등상황으로 귀결된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물론 아이도 선생님도 서로가 좋은, 좋아 보이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많은 아이들은 현재의 언어발달이 많이 느렸다. 어떤 아이는 결정적 시기라서 지금 충분한 자극을 제공해 주어야 했고, 어떤 아이는 이미 너무 나이가 든 상태라 가르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이 순간에도 정상발달을 하는 아이들은 쑥쑥 머릿속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만나는 아이들마다 접근 방식이나 시기는 각기 달랐다. 그러나 언어치료를 진행하면서 이곳은 '언어치료실이다'는 것을 아이가 받아들인다는 목표는 늘 내 치료목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련의 규칙이 없는, 자신이 놀고 싶은 대로 놀고, 그러다 끝이 나면 집에 가는.


그런 장소로 인식되게 할 수 없었다. 언어치료사였기에.


아이에게 굉장히 간단한 과제를 제시했다. 어떨 때는 이게 과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단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수용하면 진심을 다해 아이에게 칭찬하고, 아이의 요구도 들어주었다. 아이들에 따라 이 과제들을 제시하는 속도나 과제의 양, 과제의 난이도들을 조절해 갔다. 이곳은 선생님이 너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싶은 곳이고, 그 가르침을 네가 잘 받아들여 주면 정말이지 즐거운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깨달을 수 있게 돕고자 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어떤 아이들은 기존의 경험으로 인해 무언가를 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회피를 하거나, 나라는 상대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별다른 선행 사건도 없었는데 치료실에 입실하자마자 문제행동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다른 곳을 쳐다보며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아이도 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언어치료실'이었다.






때로는 아이가 치료실에서 너무 울어서 어머님께서 불안해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님 눈에는 작디작은 아이인데, 아이가 몇 번 치료실에 잘 들어갔다 나오더니 어느 순간부터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치료실 입실 전, 어머님께 설명을 드렸다.


"이제 아이가 치료의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것이며, 아이는 현재 할 수 있는 언어표현이 적다 보니 자신이 거부하는 상황이 나타나면 이를 울음이라는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울음이 조금 길어진다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울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에요. 울음을 번역하자면 '싫어 안 할 거야'인 거죠. 지금으로는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 그것이다 보니, 아이가 싫은 상황일 때 이렇게 울음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아이에게 지시하는 과제는 아이가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과제예요. 그걸 아이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저도 끈기 있게 아이를 기다리고 도와줄 테니, 어머님께서도 끈기 있게 기다려주세요. 아이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살펴보겠습니다'라고.





아이가 운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어머님의 불안한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너무도 공감되는 그 마음.

아이가 울면 내 심장이 울음소리보다 더 빨리 뛰는 듯하다.

아들이 어릴 내가 그랬다. 내 자식의 울음소리만큼 엄마의 마음을 뒤흔드는 소리가 있을까.


특히나 아직 표현이 제한적인 어린아이이기에 어머님의 마음속 파도는 더 커질 것이었다. 상담시간이 되자 그냥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고, 선생님이 시키는 걸 내가 대신해줘버리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님.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치료실에서 아이를 보다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지금 아이에게 하는 행동에 확신을 가지고, 아이에게 분명하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다.

밖에서 치료를 믿고, 함께 갈등의 파도 속을 함께 해주시는 어머님 덕분에 더욱더.

치료실은 내게 있어 그런 장소였다.


치료실에 온 것은 아이만이 아니었다. 어머님도 함께였다.

이 날은 어머님 또한 '아이가 배워가야 한다'는 걸 배우신 날이었다.


큰 산을 함께 넘었을 때, 비록 앞에 산이 있을지라도

아이도 나도 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아이도 어머님도 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혼자가 아니라 '함께' 넘었기에.


갈등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갈등은 기회다.


이를 직면했을 때, 보다 나은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내 치료실 여전하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날은 적다.


그럼에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이곳을 '언어치료실'이라는 장소로 받아들이고

오늘도 한 번 더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집 다음으로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

의사소통을 위한 많은 역사를 쌓아가고 있는 곳.

이곳이 있기에 '이지샘'이 존재할 수 있는 곳.


오늘도 나는 치료실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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