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부장님이 한숨을 푹푹 쉬며 연구실에 들어오셨다. 얼굴이 너무 안좋아보이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새로 오신 교감 선생님과 일하는 스타일이 맞지 않아 너무 스트레스라고 하셨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코로나로 인해서, 1학기 학부모 교육과정 설명회를 학부모 연수자료로 대체하기로 했다. 연구부장님이 열심히 연수자료를 만들어서 갔는데, 교감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감선생님: 전체적으로 띄어쓰기가 너무 안되어 있는 거 같은데, 조금 고쳐봐야겠네요. 그리고 처음 도입 부분은 들여쓰기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아닌가... 들여쓰기 하지 말까...
그러고는 들여쓰기를 할지, 말지를 한참 고민하셨다고 한다.
다시 연구부장님이 수정을 해서 들고 갔더니, 다시 하시는 말씀,
교감선생님: 아까, 국립국어원에 찾아보니, 띄어쓰기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경우가 많더라고요. 지금 한 띄어쓰기가 맞춤법에는 맞는데, 뭔가 답답하게 글자가 붙어있는 느낌이랄까? 다시 수정해오세요.
연구부장님: 그럼, 어디 부분을 수정을 하면 될까요?
교감선생님: 저 지금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저 바쁜 사람이에요. 그런 건 알아서 하셔야죠!
이렇게 3번을 퇴짜 맞았다고 한다.
아니, 띄어쓰기를 하든 말든, 들여쓰기를 하든 말든, 그게 학부모님들에게 중요할까?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비단 교감 선생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상황들은 교직사회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5년 전 신규 때, 공문을 올리면 항상 부장님과 교감 선생님께 이런 피드백을 받곤 했다.
붙임 다음은 무조건 두 번 띄어 쓰세요. 마지막에는 무조건 마침표를 찍어야죠!
내용에 대한 피드백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마침표 하나 안 찍혔다고 공문을 다시 올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요새 배우는 6학년 국어 5단원 '속담을 활용해요' 단원에서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속담이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잠시, 교육대학생일 때 얘기를 해보겠다. 각 조별로 수업지도안을 쓰고 교수님께 평가받는 수업이었다. 교수님이 중점적으로 본 것은 수업 내용이 아닌, 지도안이 띄어쓰기가 잘 되어 있는지, 얼마나 줄이 반듯하게 맞춰져 있는지였다. 안에 얼마나 발문 구성이 잘되어 있는지, 수업 주제가 얼마나 참신한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교육 실습을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떤 수업을 하는지보다 얼마나 지도안을 깔끔하게 썼는지 형식에 맞게 썼는지가 더 중요했다. 수업 구상은 20분 만에 끝나는데, 띄어쓰기, 줄 맞춤, 수업 모형, 성취 기준 등 형식에 맞춰 지도안을 작성하는데 1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항상 수업 준비 따로 지도안 작성 따로 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 지도안의 목적 자체가 수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도구인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띄어쓰기, 마침표를 꼼꼼하게 챙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는 문득 깨달았다. 이게 사람의 문제가 아닌, 문화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교감 선생님, 교수님이 아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교육보다 보여주기식의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문화였다.
학교폭력예방 활동을 단 1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를 잘 써서 학교폭력예방 기여 가산점을 받는 교사들, 아이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는데 승승장구 승진하는 교사들,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공문을 보내서 일선의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장학사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을 계속 양산하는 문화와 제도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하는지 생각해보자. 띄어쓰기를 위해서? 승진 가산점을 받기 위해서? 공문을 깔끔하게 쓰기 위해서? 학부모에게 민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전부 아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