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실남 Jun 16. 2020

나를 울린 초등학생의 발표

오늘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그동안 배운 속담들을 모아서 속담 사전을 만드는 차시였다. 각자 간단하게 속담사전을 만들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기로 했다.

자! 먼저 발표할 사람?

교실이 조~~ 용했다. 하... 이놈들이 5학년 때는 안그러더니 결국 6학년병에 걸리고 말았구나!!! 6학년병이란, 6학년이 되면서부터 남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감과 의욕이 하락하게 되어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변하는 병을 말한다.(내가 만듦ㅋㅋ) 그리고 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 상태를 유지할 확률이 높다.(우리 대학생 때를 떠올리면 된다.ㅋㅋ)


마음껏 발표를 할 수 있는 환경설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우리나라 대부분 학생들이 걸려 있는 병이 있어. 6학년병이라고... 저번에도 선생님이 말했었지. 근데 지금 너네들이 걸려있는 거 같아...  


아이들이 웃는다.

혹시 내가 실수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혹은 나댄다고 할까 봐 두렵지? 얘들아. 틀려도 괜찮아. 좀 못해도 괜찮아. 계속 실패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이건 좀 확실히 하자. 앞으로 우리 반에서 발표도 열심히 하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보고 '저 xx 나댄다.' 이런 생각하기 절대 없기! 앞으로 우리 반에서 발표를 많이 하는 친구는 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멋진 친구라고 생각하자!


용기를 내서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발표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발표 실력이 많이 달렸다. 목소리도 작고, 시선처리도 불안하고, 자신감도 없었다. 발표하는 내내 본인이 가져온 발표 종이만 보면서 얘기하다가, 마무리도 제대로 안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 이 친구들이 발표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구나!
얘들아. 선생님이 간지나게 발표하는 방법 알려줄게! 일단 나와서 인사하고 무슨 주제로 발표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을 해. 자신이 발표하는 내용은 당연히 종이를 안 보고도 말할 수 있어야겠지? 시선은 선생님을 바라보지 말고 친구들을 바라봐! 그리고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 속도는 너무 빠르게 하지 말고!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발표를 하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거야. 지금 앉아 있는 친구들은 나라면 어떤 식으로 발표할까 한 번 이미지 트레이닝해보도록!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마무리야. '이상 ~~~ 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만 잘해줘도 평타는 치니깐, 마무리는 꼭 신경 써줘야 돼!


자! 이제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적용해서 발표해볼 사람?


다시 조용해졌다. 자신감이 없어진 것이다. 기존에 하던 대로 발표하는 것도 힘든데, 저 많은 것들을 지키면서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얘들아. 다 연습이다. 실수해도 괜찮다. 선생님도 예전에 초등학생 때는 되게 발표 못했어...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실력이 느는 거야. 솔직히 지금 여기 있는 친구들 다 발표 못하니깐(웃음)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깐!


아이들 '할까, 말까'하면서 갈등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다. 발표하겠다고, 손을 들지 않았음에도 눈빛을 보고 그냥 시켰다.

선생님(나): 오! 그래 현석이 용감하네. 나와서 발표해보자!
현석: 네???!!!(뭥미?)


말은 '네?!' 하면서도 부르자마자 바로 교탁 앞으로 나온다. 발표 종이를 봤다가, 친구들을 봤다가 하면서 손을 덜덜 떨면서 열심히 발표를 한다. 역시나, 아까부터 선생님의 말을 듣고 속으로 계속 연습을 했음이 분명하다. 대견했다.


현석이의 발표 이후에는 한 명씩 손을 들었다. 사람마다 말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친구들에게 다른 피드백을 주었다.

음... 주환이 너는 재미있으니깐 중간에 유머를 하나씩 섞어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아까 발표할 때, 처음에 친구들이 안 웃었는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드립 친 거 좋았어. 원래 개그는 반복이거든 ㅋㅋ 방금 발표 정말 잘했어!
연지는 말이 엄청 느린데, 그걸 장점으로 삼을 수 있겠다. 말이 느리면 듣는 사람한테 신뢰감을 줄 수 있거든! 대신, 자신감 있는 표정과 시선처리 신경 쓰도록!
효주는 평소에 조용해서 목소리가 엄청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목소리도 크고 발표도 잘하네? 너는 이걸 반전미로 삼아도 될 거 같아. 조금만 더 목소리를 키우고 자신감만 더 키우면, 아마 너의 반전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재한이가 손을 들었다.


이 친구는 2년 전에도 나와 같은 반을 했는데, 당시에 자진해서 발표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작년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니 작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최근에도 자기는 만사가 귀찮고, 학교 다니는 게 너무 싫다고,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겠다던 회의적인 친구였다. 그 친구가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그냥 느껴졌다. 이 친구가 얼마나 큰 마음을 먹고 손을 들었는지를... 쭈뼛쭈뼛 걸어 나와서, 친구들 앞에 나와서 발표를 시작했다.


놀라웠다!


내가 아까 친구들에게 피드백 줬던 내용들을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손을 덜덜덜 떨면서, 친구들과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까 내가 친구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는 동안, 머릿속으로 계속 연습을 했음이 분명했다. 2년 반 동안 재한이를 지켜봐 왔고, 재한이가 그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교를 다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친구들의 박수를 받고 뿌듯해하는 재한이의 모습을 보고 결국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다. 스스로 자신이 쳐놓은 한계를 깨트린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항상 힘이 없고, 의기소침하던 재연이가 이번 기회로 성장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갑자기 작년부터 같은 반이었던 서윤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너무 감수성이 풍부한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  


음... 선생님은 진짜 웬만해서는 안 우는데, 이상하게 너희들이 스스로 한계를 깨트리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나더라. 선생님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웃음) 앞으로도 너희들이 선생님을 좀 많이 울려줬으면 좋겠다. 올해 정말 기대가 되네.(웃음)


'진짜, 이 맛에 교사하는구나!'를 또 한 번 느끼며, 국어수업을 마쳤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래희망이 꿈이 될 수 없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