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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Dec 10. 2020

하모니카 동아리가 사라질 뻔한 이유

(작년 초에 있었던 일이다.)


"0쌤. 음... 이거 말해도 되나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자기랑 내가 친분이 있으니깐..."


"(긴장한 채로)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사실은... 나도 부장님한테 들은 얘긴데... 0쌤이 작년에 운영한 하모니카 동아리를 올해도 한다고 했잖아... 어느 학년 부장님이 엄청 반대하셨다고 하더라고... 걔한테는 학교 운영비 지원해주면 절대 안 된다고... 그 이유가... 작년에 동아리 제대로 운영하는 걸 한 두 번 밖에 본 적이 없다고, 진짜 책임감 없는 선생이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 0쌤 담당 부장님은 관리 잘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아, 그리고 그 부장님이 소수의 아이들만 가르치는 하모니카 동아리를 운영할 바에는 차라리 전교생한테 공책을 사주는 게 낫다고 그랬데. 형평성 문제 때문에 학부모 항의가 들어올 수 있다고..."


"(심각) 음... 뭔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맞지? 오해지? 내가 0쌤이 신규 때부터 봐와서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거 아니깐... 나도 정말 깜짝 놀랐어..."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내가 작년에 최소 60~70번은 운영한 동아리를 1~2번 운영했다고 말했다고? 그것도 교감 선생님, 교장 선생님 다 있는 자리에서? 그리고 작년 부장 선생님은 왜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 계신 거지? 작년에 아침시간, 점심시간 내도록 내가 하모니카 가르치고 있을 때, 그때 부장님이랑 다른 선생님들은 연구실에서 희희낙락 차 마시면서 놀고 있었잖아? 그다음에 형평성 문제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작년에 4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희망 인원을 조사했고, 현재 학년 전체의 2/5 정도 인원인 60~70명이 하모니카를 배우고 있는 상태인데, 심지어는 배우고 싶은 학생들은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 했는데, 이게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1인 1악기 배우는 것보다 공책 한 권씩 사주는 게 더 낫다고? 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1년 간 내 노력이 폄하된 거 같아서 너무 기분이 나빴다.


'그래, 인정해. 내가 작년 2018년에 교실을 개판으로 만든 거는... 그래도 하모니카 동아리는... 하모니카 동아리만은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이건 아니잖아...'


작년 2018년은 내 인생 최악의 한 해였다. '내가 왜 살아야 하나?'의 의문을 가지고 1년을 헤맸다. 삶의 의미를 잃고 게임, 술로 현실도피하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하지만 슬럼프라고 해서 내가 학교에서 멍하니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되찾기 위해 계속 새로운 것들을 시도했다. 주말에 아이들이랑 모여서 피구 하고 영화보기, 새벽에 애들이랑 산타기, 과학대회 학생지도, 독서토론 동아리 등 열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두 누가 시켜서가 아닌, 내가 자발적으로 찾아서 한 활동들이었다.


하모니카 동아리도 그중 하나였다. 교장 선생님께 특별히 허락을 받아, 1년 내내 아침시간,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하모니카를 가르쳤다.


"선생님, 하모니카 부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선생님, 하모니카 동아리 오늘은 왜 안 해요? 매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씩 내 자존감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회복되었다. 때문에 하모니카 동아리에서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1년 동안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러나 나에게 돌아온 건, '책임감 없는 교사'라는 낙인이었다.




말 안 하고 가만있자니, 너무 억울해서 작년 담당 부장님께 바로 찾아갔다.


"부장님! 제가 작년에 일을 잘 못 한건 맞지만, 그래도 하모니카 동아리는 열심히 했던 거 알고 계시잖아요? 거기 있던 부장님이 한 얘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저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한 거는 뭐 이해하는데... 근데 그런 거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서 미리 증거물로 남겨뒀어야지. 기록이 없으면 안 한 거나 마찬가지야."


"아니, 실제로 아이들이 저한테 하모니카를 배웠고, 배운 아이들은 지금 다 연주를 잘할 줄 아는데, 그게 증거 아닙니까?"


"그런 거 말고 실제 그날그날 교육했다는 증빙자료가 있어야지. 기록이 생명이라니깐... 앞으로 계속 교사생활해야 하니깐 지금 잘 기억해둬."




저번주 학교에서 학교폭력가산점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때의 부장님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반감이 들었다.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증빙자료가 부족하거나 없으면, 나는 그 일을 안 한 게 되어버리는 건가? 반대로 실제로 그 일을 한 적이 없음에도, 없던 증빙자료를 만들거나 남들이 잘 쓴 보고서를 베껴서 서류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 공로가 있는 것이 되어버리는 건가?


그럼 어느 날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내 브런치의 글들이 다 사라진다면, 여태까지의 나와 아이들의 추억들은 다 없던 일이 되는 건가?


오랜만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니, 내 마음이 씁쓸해진다.



PS 하모니카 동아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운영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쉬는 중...)



#하모니카동아리 #증빙자료 #학교폭력가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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