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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재밌어진 이유

by 교실남

신혼초, 아내와 집안일 분담 문제로 엄청 싸웠다. '왜 나만 요리를 하냐, 왜 나만 청소를 하냐, 왜 나만 집안일을 하냐.' 등 특히 아내의 불만이 엄청났다.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집안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그렇게 말을 하니 섭섭했다. 우리는 이러한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집안일 분담과 관련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참의 의논 끝에 우리에게 맞는 시스템을 정했다.


우리 부부가 만든 집안일 수당제도


일단 우리 집에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기본규칙이 있다.

'식사할 때 요리는 아내가 설거지는 내가, 집 청소할 때 화장실 청소는 아내가 나머지 청소는 내가 한다.'

만약 이 기본규칙을 넘어서는 일을 했을 때는 집안일 수당을 지급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내가 너무 오늘 피곤해서 아내가 요리와 설거지를 둘 다 해줬다면, 아내는 7000원의 집안일 수당을 받는다. 아내가 주말에 아파서 같이 집 청소를 하지 못하고 나 혼자 집 청소를 했다면, 난 8000원의 집안일 수당을 받는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집안일을 하며 용돈을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집안일로 인해 싸우는 일이 확 줄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새로운 규칙에도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집안일이 다시 지루한 일, 하기 싫은 일이 되어 버렸다. 지루함에서 벗어나 재미를 찾기에 보상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나는 아내와 갈등이 생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니르 이얄, 줄리 리 작가의 <초집중>은 나 같이 반복되는 일에 지루해진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권태에는 호기심이 명약이다. (중략) 재미란 무언가에서 남들이 못 보는 가변성을 찾는 것이다. 따분함과 단조로움을 돌파해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다. -초집중, 64p-


저자는 재미란 익숙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했을 때 생기는 결과라고 했다.


'아! 우리에게 당연하고 익숙한 상황에서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나 방법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미구나!'


'흠... 재미하면 게임이지. 내 일상에 게임적 요소들을 넣어보면 어떨까?'


게임을 떠올리니 갑자기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샘솟았다. 바로 실천에 옮겨보았다.



첫째, 집안일에 게임의 퀘스트적 요소를 도입했다.


거의 모든 게임에는 퀘스트가 있다. 캐릭터 육성 게임의 경우 몹을 때려잡고 경험치와 돈, 아이템을 얻는다는 면에서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의 스토리나 퀘스트 내용은 늘 새롭다. 그리고 퀘스트는 우리에게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1단계를 깨면, 2단계가 나오고, 2단계를 깨면 또 그다음 단계가 나온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퀘스트의 난이도도 업그레이드된다. 내 수준에 딱 맞는 혹은 그보다 좀 높은 수준의 과업이 계속 생성되니, 몰입을 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렇게 게임에 빠지게 된다.


게임의 NPC가 퀘스트를 부여하는 것처럼, 집안일을 할 때에도 나 스스로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설거지 퀘스트(난이도1): 20분 안에 설거지 끝내기, 보상: 10분 휴식'


'설거지 퀘스트(난이도3): 자기계발 유튜브 강의 들으면서 200분 만에 설거지 끝내기, 보상: 1000원'


'집 청소 퀘스트(난이도4): 최소한의 동선으로 20분 만에 집 청소 끝내기, 아내가 대충 했다고 말하는 순간 미션 실패, 보상: 4000원'


퀘스트 내용이 너무 지루하다 싶으면 바꿨다. 설거지 시간을 단축한다던지, 설거지를 하면서 스쿼트를 한다던지, 이런 식으로 새로운 것을 계속 찾았다.



둘째, 심상화와 기록을 통해 성장을 느껴보았다.


게임에는 성장 요소가 있다. 일정량 이상의 경험치를 얻으면 레벨업을 한다. 레벨업이 되면, 레벨업 포인트로 HP(체력), MP(마나), 민첩, 지능, 무력 중에 선택을 해서 자신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게임과 같은 성장이 분명 있다. 하지만 성장이 눈에 바로 보이는 게임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내가 스스로 성장했는지 확인하기가 힘들다. 또한 성장에 따른 즉시적 보상이 주어지는 게임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실제 성장을 하더라도 보상이 바로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다.(지연된 보상)


이러한 게임과 현실의 괴리감을 줄이고자, 심상화와 기록의 방법을 사용해보았다. 먼저 집안일 퀘스트를 달성할 때마다, 게임처럼 '나'라는 캐릭터의 집안일 능력치가 오르는 장면을 심상화했다. 기존의 집안일 수치가 50이었으면 51로 올랐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상상을 하는데 고작 3초 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 3초의 시간으로 나는 좀 더 성장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심상화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성장을 기록했다.

보상 목록(좌), 데일리 리포트(우)


우리 부부가 사용하는 규칙판 가장자리에 집안일을 하고 받은 보상들을 기록했다. 그리고 매일 쓰는 데일리 리포트에도 오늘 한 집안일과 그에 대한 집중도를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이니 나의 성장이 보였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에, 일상생활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지루했던 집안일에서 다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위에 소개한 방법들은 집안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응용할 수 있다.

-글쓰기: 비슷한 퀄리티의 글 더 빨리 쓰기, 보상: 글쓰기 능력 상승, 시간 절약
-출퇴근 운전: 자동차 연비 올리기 놀이, 보상: 운전 능력 상승, 기름값 절약
-독서: 비슷한 수준의 글 정해진 시간 안에 전보다 더 빨리 읽기 + 1시간 동안 독서하면서 글 쓸 소재 1개 이상 찾기, 보상: 지력 상승, 시간 절약, 글 소재 생성
-부부관계: 와이프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3번 이상 진심을 다해서 말해주기, 보상: 와이프의 사랑, 화술 능력 상승


다시 한번 더 기억하자.


재미란 무언가에서
남들이 못 보는 가변성을 찾는 것이다.


지금 당장 찾아보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던 것을. 우리의 일상을 재미있게 만들어 줄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을.



#집안일 #재미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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