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의찬(가명)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지 4일이 지났다. 때마침 주문해둔 수학 문제집도 와서,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의찬이와 함께 3학년 1학기 수학부터 시작해서 12월 말까지 5학년 1학기까지 끝내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집까지 찾아왔던 선생님에게 미안했던 탓일까, 아니면 새로운 내적 동기가 생겨서일까, 의찬이는 생각보다 나의 지도에 잘 따라왔고, 불과 4일 만에 3학년 1학기 문제집을 한 권 풀었다. 비록 초등학교 3학년 수학 문제집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성과였다. 수학 문제집 한 권을 다 푼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했다.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선생님, 주말에 숙제 어디까지 해오면 돼요?"
'숙제'하면 몸서리치던 의찬이가 먼저 숙제를 물어보다니... 이번 성취로 꽤 자신감이 생긴 듯했다.
"음... 네가 직접 정해봐. 네가 주말 동안 할 수 있는 만큼만."
잠깐 고민하더니, 평소 하던 숙제 분량보다 상당히 많은 양을 풀어오겠다고 했다. 할 수 있을지 우려를 표시했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의지를 불태우는 의찬이의 모습을 보고,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사실 애초에 숙제를 다 해오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숙제의 양도 많았고, 공부습관이 잘 형성되어있지 않은 의찬이에게는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의찬이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번 주의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죄인과 같은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았다.
"숙제는 해왔어?"
"(풀이 죽은 목소리로) 음... 못했어요..."
"(놀라며) 응? 하나도?"
"네..."
"그럼 그 많은 주말 시간 동안 뭐했는데?"
"그냥 놀았어요. 게임하고..."
"..."
하... 숙제를 조금이라도 해왔다면 '그래. 처음은 그럴 수 있지.'하고 위로도 해주고 처음으로 주말에 숙제를 하려고 마음먹은 것에 칭찬을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조금 '한' 것과 아예 '안'한 것은 다르다.
"하... 의찬아, 너는 왜 집에만 가면 그래? 네 생각에는 뭐가 문제인 거 같니?"
"그냥 집에만 가면 게임이 하고 싶어요. 숙제 생각이 안 나요... 죄송합니다..."
의찬이의 의지는 보기 좋게 집 안의 컴퓨터 게임이라는 환경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리 게임을 해도 말리지 않는 조부모님의 역할도 한 몫했다. 의찬이의 뇌 속에는 '집=게임하는 곳, 노는 곳'이라는 각인이 되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일에 숙제를 내줬을 때도, 대부분 학교 쉬는 시간에 문제를 풀었지, 집에서는 거의 풀지 않았다고 했다.
'아예 컴퓨터를 치워버려? 아냐, 그러면 또 저번과 같은 일이 반복되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14년 동안 단단히 굳어진 '집=게임하는 곳'이라는 습관을 단기간에 바꾸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로 했다.
"의찬아, 오늘 수업 마치고 선생님이랑 도서관에 한 번 가볼래?"
"도서관이요?"
마침 도서관은 의찬이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거리였다. 도서관이라는 새로운 장소를 의찬이가 공부를 하게 만드는 신호로 정하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았다.
그날 공부가 끝나고 바로 도서관에 갔다. 열람실은 따로 학생증이나 대출증이 필요 없었다. 시설은 깔끔하고 꽤 넓었다. 의찬이 또래의 학생들도 몇몇 보였다. 열심히 공부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자극받기에도 좋겠다 싶었다. 의찬이의 집보다는 도서관이 공부환경에는 훨씬 적합했다.
"와... 여기 괜찮은데? 의찬아, 주말에는 도서관에 오면 되겠다. 여기 오면 공부를 안 하고 싶어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겠다. ㅎㅎ 주중에도 선생님이랑 수업 안 하는 날에는 여기와도 좋고. 아니다. 그냥 매일 가도 괜찮겠다."
기뻐하는 나와는 달리 의찬이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긴, 아예 새로운 환경이고 무엇보다 여기는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으니깐...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의찬이가 물었다.
"선생님, 설마 주말에 여기 하루 종일 있어야 되는 건 아니죠?"
"에이, 그렇게까지는 안 할 거야. 도서관도 순차적으로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 가보자. 처음에는 와서 30분 정도 공부하다가 적응되면 조금씩 늘리는 식으로. 대신에 매일 들리는 걸로."
"매일요?"
"응. 어차피 숙제해야 하잖아. 일단 평일은 30분만 하고 주말은 1시간 정도 어때?"
"네..."
"아, 그리고 너 만약에 숙제 제대로 안 해오면, 주말에 도서관에 하루 종일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거다?"
"네? 헐..."
사실 그동안 걱정이 많았다. 지금 나와 수업을 하면서도 주말만 되면 리셋이 되는데, 올해 말에 나와의 수업이 끝나게 되면 과연 의찬이가 공부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공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하기 위해, 당장의 지식 전수보다는 공부습관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설정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도서관은 꽤 괜찮은 환경설정이었다. 잘만 습관으로 만든다면, 의찬이가 지속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서관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 내가 없어도 의찬이가 꾸준히 학습을 이어나갈 수 있게끔 만들 수 있는 환경 설정 요소가 필요했다.
이를 의논하기 위해, 의찬이 중학교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