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에게 분노의 샤우팅을 시전한 이유

이유 따윈 필요 없어! 매뉴얼 대로만 하면 돼!

by 교실남

내 막내 조교생활은 정말 악몽 같았다. 처음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막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훈련병이 있을 때에는 인솔, 시범, 관장을 도맡아 했고, 그나마 훈련병이 없을 때, 조금 쉬려고 하면 온갖 차출(제초, 각종 짐 나르기, 국기 달기, 천막 치기)에 불려 나갔다.


특히, 훈련병 입소 2주차인 특별병영생활주 기간에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막내 업무를 하고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생활관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선임이 후임을 배려하고 도와주고 그런 건 없었다. 상병 이상들은 간부들이 터치하지 않는 이상, 조교 휴게실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어서 빨리 내가 상병이 되기만을 혹은 내 밑에 후임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2달이 지나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맞후임이 2명 들어왔다. 온갖 일로 지쳐 있던 내 눈에 비친 이들의 모습은 흡사 '천사'와도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들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가 내 막내 생활의 연장일 줄은...


맞후임들은 정말 착했다. 근데 착하기만 했다. 전형적인 사람은 좋은데, 일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일을 워낙 못해서 화를 내려고 해도, 해맑게 방긋 웃는 모습에 괜히 나만 나쁜 사람 되는 것 같아 웬만한 일들은 참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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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들이 보다 원활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동기들과 함께 예전 선임들이 만들어놓은 자료들을 모아서, 막내 조교 '매뉴얼북'을 만들었다. 막내 조교가 해야 할 일, 하나부터 열까지, 자그마치 20p 정도 되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워낙 돌발변수가 많이 생겨나는 환경이다 보니, 상황과 맥락에 맞게 행동하는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우리(동기와 나)는 판단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왜 이러한 매뉴얼들이 만들어졌는지, 돌발상황에서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일일이 다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맞후임들을 잘 가르쳐놓으면, 맞후임들이 새로 들어오는 후임들 교육도 잘할 테고, 결국 우리 대대의 일이 잘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맞후임이 들어오고, 4개월 뒤 맞맞후임이 들어왔다. 우리 기수는 막내 생활을 이미 6개월이나 한 터라, 맞후임들에게 후임 교육을 전적으로 맡겼다. 그러다 우연히 이들이 후임들을 교육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맞맞후임: 00 일병님! 여기 종이랑 마카는 어디에 쓰는 겁니까?
맞후임: 음... 나도 몰라. 매뉴얼 종이에 챙기라고 적혀있던데? 그냥 우리는 매뉴얼 대로만 하면 돼! 이유 따위는 필요 없어!
맞맞후임: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무슨 바보들의 대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종이와 마카는 소대장님들이 처음 입영하는 훈련병들에게 소대번호를 설명하기 좀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 준비한 물품이었다. 예전에 분명히 이들에게 여러 번 설명해주었고, 심지어 이 친구들은 소대장님들이 마카를 사용하는 장면도 함께 봤다.


순간 빡침이 올라왔고, 마치 훈련병들에게 하는 것처럼 후임들에게 분노의 샤우팅을 지르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가끔씩 학교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혹여나 내가 근본적인 이유도 모르고 매뉴얼 대로만 일을 처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기존에 하던 거니깐'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진리들이 과연 절대적인지?


오늘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조교생활 #조교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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