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목적전치현상
군에 조교로 복무할 때였다. 나에게는 일을 더럽게 못하는 맞후임이 있었다. A라고 칭하겠다. 정말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일머리가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스타일이었다. 이 친구가 사고를 칠 때마다, 난 소대장님과 선임들에게 불려 가서 신나게 털렸다. 하지만, A가 워낙 열심히 하려고 하고, 사람이 좋으니 화는 못 내겠고,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 보기로 했다.
당시 일병 막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루에도 수십 가지였다. 이걸 하나하나 다 챙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동기들과 함께 업무에 어려움을 겪는 후임들을 위한 업무 가이드북을 만들었고, A에게는 가이드북을 참고해서 하루 할 일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침 할 일-
□ 대대 외등 켜기
□ 불침번들 체크
□ 훈련병 깨우는 방송하기
□ 불침번들에게서 TRS 회수
□ AED 챙기기
□ 급양 소대 인솔
□ 세탁된 모포 나르기
□ 항의전대 훈련병 인솔 등등....
매일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의 목록을 적고, 하나하나 체크를 하도록 했다.
A의 업무 능력은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A의 잘못으로 인해 소대장님과 선임에게 불려 가서 혼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나도 V자 표시로 가득 채워진 A의 수첩을 보고, A를 칭찬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대 내에 일을 할 수 있는 조교가 A와 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단 2명이서 800명이나 되는 훈련병들을 인솔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모두들 총기를 들고 있는 상태였고 목발 환자의 수도 수십 명이었다.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에서 후임이 손에 수첩을 들고 해맑은 표정과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본인은 그렇게 말하면 나에게 칭찬받을 줄 알았던 것 같다...)
'00 일병님, 저 수첩에 적혀 있는 체크리스트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대대본부로 사라졌다. 결국 나는 혼자서 대대 전체를 인솔했고, 처음으로 후임에게 분노의 샤우팅을 날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체크리스트가 중요하냐! 이 XX아!
A는 수첩에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 체크를 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꾸준하게 성취감을 얻었고, 어느 순간부터 체크리스트는 일을 잘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돼버렸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학습이 된 것이다. 큰 사건이 터진 뒤에야, 후임은 자신이 수단과 목적을 혼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이런 경우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 몇 가지 사례로 들어보겠다.
사례1. 임용에 합격하기 위해, 본인이 공부한 내용을 중간중간 SNS에 정리해서 올린 학생 B. 어느 순간부터 따봉에 취한 그는 급기야 여러 임용공부책을 짜깁기한 책을 만들어서 SNS에 올렸고, 수 백개의 따봉은 받았지만 임용은 떨어지고 만다.
사례2. 불합리한 교직 문화를 바꾸고자 승진을 결심한 C교사. 어느 순간부터 C교사는 애초의 목적은 잃고 승진을 위해 온갖 불합리한 일을 저지른다.
사례3. 돈을 많이 벌어서, 아내와 여행을 가고 싶은 D는 적금 통장을 깨서 주식시장에 돈을 넣는다. 어느새 주식에 빠지게 되고 여행을 가자고 하는 아내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낸다.
사례4. 독서와 자기 계발을 통해 인생을 바꾸고 싶은 E. 무려 2년 동안 200권이나 되는 책을 읽는다. 하지만 책에 있는 내용은 하나도 실천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만 마음을 뺏겨 버린 E.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면서, 우리는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곤 한다. 삶을 살아가다 가끔씩은 지금 내가 이 일을 하는 목적은 뭔지, 내 삶의 우선순위가 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