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츄카드의 진실

by 교실남

한 4~5년쯤 전 버츄카드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요즘도 활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버츄카드는 인성교육카드로서, 감사, 배려, 겸손, 사랑 등의 52가지 미덕을 담은 카드다. 이 카드를 통해 여러 가지 인성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데, 교육 현장에서도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버츄카드 열풍은 학교현장을 지나, 군대까지 넘어왔다. 2016년 2월, 당시 훈련병이었던 나는 학교현장에서 지겹도록 본 버츄카드를 군대에서도 보게 되었다. 훈련 1주차, 버츄카드는 훈련병 각자에게 1세트씩 배부되었다.


그러나 우리 소대는 인성 활동을 한 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반면 옆 소대의 소대근무의 얘기를 들어보니, 본인들은 매주 2~3번씩 인성교육 활동을 한다고 했다. 2~3명씩 짝을 짓고, 본인이 선택한 가치카드와 평소에 걱정하는 일을 연관 지어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쉴 시간이 없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꽤 괜찮은 활동이라고 했다.

여기서 본인이 선호하는 가치 카드를 선택한다.


우연히 옆 소대의 생활관 앞을 지나는데, 그 소대근무가 말한 대로 그들은 인성교육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각 호실에는 본인들이 선정한 가치덕목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속으로 '와... 훈련도 하고 버츄카드 활동도 하고 진짜 힘들겠다...'하고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훈련 4주차 주말, 소대장님께서 인성검사지를 나눠주셨다. 1주차에 이미 검사한 인성검사지랑 똑같았다. 오후 4시까지 검사지를 다 모아서 제출하라고 하셨다.


하필 그날은 엄청 바쁜 날이었다. 우리 소대는 급양 당번(급식 관련된 일)에다 청소 당번이었다. 새벽에 급양 일을 하고 바로 종교 참석에 갔다가, 생활관 주변 청소를 했다. 생활관 청소를 하고 난 뒤에, 또 급양 일을 하고 바로 강당 청소를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생활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미친 듯이 인성검사지를 작성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제때 검사지를 제출하지 못하면 단체로 기합을 받을 것 같았다. 그때, 한 소대원이 외쳤다.

보니깐 5번이 다 좋은 거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5번 다 찍자!


대부분의 소대원들이 5번을 찍었고, 그 덕분에 제 때 검사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큰 문제로 번질 줄은...




2주 뒤, 난 무사히 6주 간의 훈련을 끝마치고 조교가 되었다. 당연히 자대도 훈련소 그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단장님께서 우리 대대원 전부를 소집하셨다. 대대장님, 중대장님, 소대장님, 심지어 조교까지 다 소집되었다. 이유를 여쭤보니, 단장님께서 어떤 설문 결과로 인해 대노하셨다고 한다. 다행히 그 자리에 단장님은 계시지 않았다. 중대장님이 앞에 나와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하는 이유는 이랬다.


단장님은 원래 인성교육으로 유명한 분이시라고 한다. 그 중, 버츄카드 활동은 단장님이 강력하게 밀어붙이신 활동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실험군과 대조군(아무 것도 안한 우리소대가 대조군)을 나누어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근데 이게 웬 걸? 1주차에는 실험군과 대조군의 인성검사 점수가 비슷하게 나왔으나, 4주차에는 대조군의 인성검사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다.(ㅋㅋㅋ....) 오히려 버츄 활동을 한 실험군은 변화가 거의 없었다. 단장님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가 나왔고, 그 책임을 중대장, 소대장님들에게 물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마치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소대장님들이 한분 한분 이렇게 결과가 나온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하셨지만, 납득할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특히, 대조군이 갑자기 인성 점수가 높아진 것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회의 시간이 벌써 2시간이나 넘어가고 있었다. 2시간 동안 나는 '진실을 말할까? 말까?' 엄청 고민을 했다.


'실험군의 인성점수가 낮은 것은 애초에 고된 훈련 일정에 맞지 않는 인성교육을 넣었기 때문이고, 대조군의 인성점수가 높은 이유는 훈련소의 바쁜 일정 때문에 생긴 참사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진실을 말하고픈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중대장님과 소대장님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까 두려웠고, 그 책임이 또 나에게 전가될까 두려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토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침묵했다.


그렇게 버츄 카드 프로젝트는 우리 기수를 끝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학교에서 회의를 하거나 내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가끔씩 그때의 사건이 겹쳐 떠오른다.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말은 하지 못하는 그 답답함...

그때 내가 진실을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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