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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an 17. 2022

#6 선생님, 저 포기할게요.

(이전화)


의찬이와 공부를 시작한 지 5일째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 적어도 4~5시간 이상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지만, 의찬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2시간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늘려나가기로 했다. 먼저 의찬이의 수준에 맞는 수학 문제집을 여러 권 주문했다. 문제집이 배송되는 동안, 의찬이가 부족한 사칙연산 학습지를 풀기로 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몇백 몇십의 덧셈)부터 2학기 (몇십몇 × 몇)까지 약 60p 분량의 문제들. 문제집이 오기 전까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의 양이었다. 일단 질보다 양이라고 생각했다. 양이 질을 만들지, 질이 양을 만들지는 않는다. 의찬이가 그동안 문제를 많이 풀어본 적이 없었기에, 최대한 많은 문제를 풀렸다.


예상외로 잘 따라왔다. 의찬이는 약간의 계산 요령만 가르쳐줘도 이를 잘 활용했다. 문제를 푸는 속도도 어제보다 두 배는 빨라졌다. 그렇다. 의찬이는 머리가 나빠서 혹은 수학에 재능이 없어서 수학을 못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안 해서 못 한 거였다.


"의찬아, 지금 네가 풀어야 할 분량이 25p 정도 남았는데, 주말 동안 이거 다 풀어올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진짜? 흠... 걱정되는데..."


"한 번 해볼게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 믿는다. 미뤘다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루하루 조금씩 나눠서 해보는 게 어떨까? 금, 토, 일 이렇게 나누고 선생님한테 푼 것들 하루하루 인증샷 보내는 거 어때?"


"네! 한 번 그렇게 해볼게요."




금요일 밤.

의찬이에게 문자가 왔다. 인증샷을 보니 벌써 숙제의 1/3을 끝냈다.

'(흐뭇) 기특한 녀석!'


토요일 밤.

의찬이의 문자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문자는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일요일 오전.

의찬이에게 문자와 전화연락을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일요일 밤.

여전히 의찬이의 문자는 오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설마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지?'




다음 날 오후 3시, 의찬이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의찬이 지금 학교 마쳤는데예. 애가 머리가 너무 길어 있어서 머리 좀 자르고 가겠습니더!"


"아... 네...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주말에도 충분히 시간이 있었을 텐데, 굳이 지금 이 시간에 머리를 자른다니... 1분, 1초가 아까운데... 뭐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지. 일단 기다려보자.'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의찬이는 오지 않았다. 다시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의찬이는 언제 오나요?"


"네, 지금 머리 자르고 있습니더."


"아니, 1시간 전에도 머리 자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할머니, 저 의찬이 공부 1월까지 밖에 못 봐줘요. 지금 1분, 1초가 아까운 시기인데... 최대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 네~ 알겠습니더. 의찬아 빨리 챙겨라!"


20분이 지났다. 다시 할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의찬이가 머리가 아파서 오늘 수업 못하겠답니더."


"네? 갑자기요?"


"애가 너무 피곤해하네예. 몸도 좀 안 좋은 거 같고... 오늘만 좀 쉬면 안 되겠습니까?"


하... 아픈 건 분명 핑계다. 2년 반 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마치 그때의 데자뷰 같았다. 며칠 공부하다 바로 포기하는 의찬이, 힘들면 그냥 안 해도 된다고, 의찬이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조부모님... 몇 번의 포기와 몇 번의 설득이 반복되면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제발 공부 좀 해달라고 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왔고, 결국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때의 전철을 똑같이 밟을 순 없었다. 좀 더 확실하게 나갈 필요성이 있었다.


"할머니, 의찬이랑 저번에 약속을 했는데요. 의찬이가 중간에 포기하거나 못하겠다고 하면 제가 더 이상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했거든요.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제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저도 없는 시간 겨우 비워서 의찬이 가르치려고 하는데, 이렇게 쉽게 약속을 어기면 안 되죠...."


"(깜짝 놀라며) 네! 알겠습니더! 의찬아 들었제? 빨리 가라!"


(잠시 후)


"선생님, 의찬이가 너무 힘들다고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합니더. 공부도 이제 못하겠다고 합니더."


"(...) 할머니, 의찬이랑 전화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여보세요?"


"의찬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거니?"


"(한참 침묵) 그냥 못하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힘들면 그냥 하지 말래요. (다시 침묵)"


"(순간 화가 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못하겠더라도 선생님한테 직접 찾아와서 말해야지, 이런 식으로 전화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니? 일단 얘기를 해보자. 지금 바로 학교로 와."


"지금요?"


"그래, 지금 바로 와. 일단 얘기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해보자."


"네..."


10분 뒤, 의찬이가 학교에 왔다. 대화를 시작했다.

"주말에 선생님 연락은 왜 안 받은 거니?"


"아... 봤는데 다시 전화하는 걸 까먹었어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솔직하게 얘기해봐."


"사실... 숙제를 안 해서 혼날까 봐..."


"아니, 그래도 연락은 받아야지. 그런 식으로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이 될까? 숙제를 얼마나 안 했길래?"


"주말에 게임한다고 하나도 안 풀었어요..."


"..."


진정하자. 진정.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이어나갔다.

"음... 숙제가 너무 많았나? 많으면 많다고 선생님한테 얘기를 하지... 그리고 회피하는 습관은 안 좋은 거야. 선생님이 많이 안 혼낼 테니깐 전화하면 꼭 받았으면 좋겠다."


"선생님, 근데 저 진짜 못 하겠어요. 앞으로 게임도 못 하고..."


주된 이유는 게임이었다. 저번에 작성한 계약서에 게임을 끊는다는 조항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그래서 3~4주 정도의 유예기간을 줬는데도 그게 부담이었나 보다.


"그래. 게임은 서서히 끊는 걸로 해보자."


"선생님, 그래도 못하겠어요."


막무가내였다.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지금 공부를 안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지금의 기회가 얼마나 천금 같은 기회인지, 지금 잠깐 힘들지 습관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소귀에 경읽기였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다.


"그럼 수요일에 담임 선생님이랑 하는 영어 수업도 안 할 거야?"


"그건... 할 거예요. 친구들도 있고, 공부 시간도 얼마 안 되고..."


"(...) 그래, 알겠다. 그럼 이제 수업은 안 하는 걸로... (다시 분노) 이럴 거면 왜 선생님한테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 계약서는 왜 작성했고? 지금 그만두면 앞으로는 선생님 지원 절대 없다. 알겠어?"


"죄송합니다..."


그러고선 나가는 의찬이... 당혹스러우면서 화가 났다. 분명 저번 주 금요일까지만 했어도 의지가 충만했던 의찬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한 번에 바뀔 수 있나? 선생님과의 약속, 자신과의 약속을 이렇게도 쉽게 깰 수 있나? 그동안 했던 노력들(의찬이와 상담, 수학 수업, 학원 구하기, 담임선생님과의 통화, 복지관 연락)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뭐지? 이건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도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의찬이 중학교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드렸다.

"와... 진짜 화가 나네요. 어처구니가 없네요. 진짜. 그러면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영어 수업은 하겠다고 하고. 화가 나서 저도 안 할래요!"


의찬이 담임 선생님도 얘기를 듣고는 대노하셨다. 같이 지금의 상황을 푸념하다가 진정하고 이번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교육이 참 쉽지가 않네요. 어른들 생각으로는 딱 이 좋은 기회에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또 그게 아니고... 어렵네요. 정말..."


"그러게요...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발로 뻥 차 버리다니... 진짜 안타깝네요... 옆에서 조부모님이 조금만 더 챙겨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보니깐 할아버지가 힘들면 하지 말라는 주의시더라고요. 작년에 학원 끊으라고 한 것도 할아버지시고... 매 번 힘들면 포기하라고, 너는 어차피 안 된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게 의찬이에게 영향이 좀 컸던 거 같아요."


"결핍이 없다는 것도 문제인 거 같아요. 보통 변화를 하려면 지금의 상황에 대한 결핍, 불만이 있어야 하는데, 의찬이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아요. 마음껏 게임을 해도 아무도 터치를 하는 사람도 없고, 놀리는 친구 없이 학교 친구들도 다 착하고... 어차피 지금 행복한데, 굳이 지금 바뀌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는 거 같더라고요. 지금의 행동들이 누적되면 나중에 힘들어질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직접 겪어본 게 아니니 가슴으로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맞아요... 2년 반 전, 의찬이가 5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쉬는 시간마다 구구단을 외우게 했는데, 그게 의찬이가 엄청 스트레스였나 봐요. 학교 가기 싫다고, 죽고 싶다고 아침에 집에서 할머니를 힘들게 해서 경찰이 온 적이 있어요. 다른 친구들한테는 쉬운 숙제가 의찬이한테는 죽을 정도로 힘들었던 거죠.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숙제를 해본 적도 없고, 누가 시킨 적도 없으니... 근데 몇 달 지나고 나니깐 또 적응을 하더라고요. 숙제도 잘해오고... 자기도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고. 음... 생각을 해보니깐 제가 너무 의찬이에 대한 기대치를 너무 높게 잡은 것 같기도 하네요. 게임도 바로 끊으라고 하고 수학도 내년 1월까지 초등과정 끝내야 한다고 하고... 의찬이의 수준에 맞춰서 생각했어야 했는데, 너무 또 제 입장에서만 생각을 한 거 같네요... 갑자기 의찬이한테 미안해지네요."


"아니에요. 너무 자책하시지 마세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우리 입장에서는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내년까지 애를 계속 케어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잠깐 고민하다) 선생님, 우리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네?"


"뭔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도 찝찝하고 아쉽잖아요. 진짜 마지막으로 의찬이에게 기회를 더 주는 건 어떨까요?"


"음... 가능할까요? 의찬이는 이미 안 하겠다고 한 상황이고... 학습동기가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시켜봤자 서로 시간낭비일 거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의찬이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여요. 아직은 변화의 시기가 아닌 거 같아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제가 아까 느낀 건데요. 의찬이가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영어는 계속하는데, 일주일에 네 번 하는 수학은 안 할 거라고 했잖아요. 영어는 상대적으로 쉽고 공부하는 시간도 적고 해서 그런 거 같아요. 처음은 의찬이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수준을 확 낮추고 성공의 경험을 할 때마다 점진적으로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어떨까요?"


"음... 그 방법이 좋긴 한데... 시간이... (한참 고민...) 하... 네... 알겠습니다. 뭐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는 아쉬우니깐, 다시 시도해보죠. 음... 오늘 의찬이 집에 한 번 가봐야겠어요. 의찬이뿐만 아니라 의찬이 할머니, 할아버지랑도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아요."




다시 의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씩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선생님인데. 의찬아, 지금 너희 집에 선생님 방문해도 되니? 할머니, 할아버지랑도 한 번 대화해보고 싶어서... 할머니께 한 번 여쭤봐."


"(잠시 후) 네. 가능하다고 하세요."


"어디로 가면 되니?"


"제가 000 앞에 서 있을게요."


그날따라 날씨가 꽤 추웠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온 의찬이.

"의찬아, 너는 왜 항상 맨발이야?"


"(웃음) 귀찮아서요. 선생님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돼요."


의찬이의 길안내에 따라 언 손을 호호 불며 좁은 골목길을 한참 걸었다.

"의찬아 왜 이렇게 집이 높이 있어? 생각보다 좀 머네."


"거의 다 왔어요."


그렇게 도착한 의찬이의 집.


의찬이의 집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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