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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Feb 26. 2022

돈을 빌려달라는 초등학교 동창의 연락

오후 2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초등학교 동창 A의 연락이었다.


콜백을 할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다 안 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이 연락처가 A의 연락처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2년 전 안부인사차 연락을 했지만, 읽씹 당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연락처가 바뀌었나 보다.'하고 그냥 넘어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A의 연락처가 맞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지도 4년이 넘었다. 직접 대면으로 만난 지는 10년이 넘었다. 통화를 하면 어색할 것 같았다. 진짜 친한 친구는 몇 년 만에, 심지어 10년 만에 연락을 해도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것처럼 어색하지가 않다. 하지만 A와 그 정도 관계까지는 아니었다. A와 나는 딱 초등학교 동창 그 이상 그 이하의 관계도 아니었다. 


몇 년 만에 뜬금없이 연락이 온 자체가 이상하고 어색했기에, '잘못 걸었겠지.'하고 그냥 넘겼다. 혹시 중요한 일이면 따로 문자를 보내겠거니 했다.



늦은 저녁을 먹는 도중, A에게서 카톡이 왔다.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연락이 온 걸까? 아니면 나쁜 일? 아니면 그냥 안부인사 연락? 일단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어색) 어, 오랜만이네."

"진짜 오랜만이네. 많이 바쁘나?"

"아……. 나는 네가 전화를 잘못 건 줄 알았어."

"우리 몇 년 전에 연락했었는데, 그지? 아직 초등교사하고 있어?"

"어, 하고 있지. 우리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때가 4년 전인가? 시간 진짜 빠르네. 2년 전에 너한테 연락했었는데 기억나? 그때 네가 연락을 안 받아서 난 네 번호 바뀐 줄 알았는데……."

"아……. 그랬었나...?"

"혹시 무슨 일 있어?"


A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뭔가 다급하고 초조해 보였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오랜만에 미안한데……. 오랜만에 미안한데……. 혹시 돈 조금만 빌려줄 수 있어?"

"음……."

"이거 해결되면 바로, 꼭 갚을게."

"음……. (침묵) 무슨 일이야?"


A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출 2000만원을 했는데, 대출사기를 당해서 몇 배로 불어났다고 했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 개인회생 신청을 했는데, 신청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고 했다. 지금 도와주면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다.


사실 A와 처음 통화를 할 때는 솔직히 언짢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데, 다짜고짜 몇 년 만에 연락 와서 돈을 빌려달라니……. 하지만 A의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예전에 TV에서 친구와의 돈 관계에 대해 방영하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돈만 빌려주라고, 돌려받지 않을 생각하지 말고 빌려주라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너무 힘든데……. 50만원 정도만 빌려줄 수 있어?"

"(……) 내가 지금 당장은 현금이 별로 없거든. 다음 주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괜찮아?"

"혹시 지금 있는 것만이라도 바로 줄 수 없을까?"

"(……) 그래……. 힘내라."

"힘내서 얼른 문제 해결할게. 고맙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화가 난 아내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바로 결정을 할 수 있냐고 했다.

"50만원이면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 용돈에서 빼면 안 될까?"

"50만원이 작은 돈이야? 정말 작은 돈이라고 생각해? 우리 월급에서 비율로 따져봐 봐. 어떻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있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준다 했을 때, 선뜻 허락을 해주었던 아내가 이번에는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아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랑 친해? 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자기 친한 친구면 바로 빌려줄 수 있지. 근데 친하지도 않다며?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만난 친구한테 어떻게 돈을 빌려줄 수가 있어? 자기가 무슨 자선사업가야?"

"미안……. 얘기를 들으니 너무 안타까워서……."


아내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내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 친구에게 선뜻 돈을 빌려줄 이유가 없다. 대출사기를 당한 것도 성인인 본인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A의 죽어가는 목소리와 초등학생 때 A의 천진난만했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내가 말했다.


"50만원은 너무한 거 같고. 20만원만 보내. 돈은 안 돌려받아도 되고. 아까 50만원 준다고 했는데, 안 주면 좀 그러니깐 내 핑계 대도 돼."

"미안, 그리고 고마워."



돈을 부치고 나서도 마음이 계속 찝찝했다. 도대체 내 마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50만원을 다 부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일까? 예전의 해맑았던 친구의 얼굴과 방금의 죽어가는 목소리가 겹쳐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한 것에 대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더 현명하게 대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순간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대처를 했을까 궁금했다. 초등학교 동창 B에게 연락을 했다. B는 초, 중, 고 때 단짝 친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1년 반 전 결혼식 때도 초등 동창 중 유일하게 축하를 해준 친구다. 오랜만에 연락을 했지만 마치 얼마 전에 본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B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 전에 자기한테도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때 30만원을 빌려주었고, 며칠 뒤에는 25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더 이상 못 빌려줄 거 같다고 했지. 나도 형편이 어려워서 힘들 것 같다고 말했지. 솔직히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2년 전 동원훈련 때, 걔 만났거든. 근데 그것도 초등학교 졸업한 뒤에 처음으로 본 거야. 얼마나 급했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너라면 몰라도 걔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니깐 선뜻 돈을 빌려주기가 좀 그렇더라."

"아……. 너도 나랑 생각이 비슷하네……. 뭔가 좀 그래……."

"알지, 알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친구랑 통화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뭔가 찝찝했다. 초등학생 때의 A의 장난기 많고 천진난만했던 모습과 방금 통화에서 보여준 어른이 된 A의 모습이 계속 겹쳐 떠올랐다.


늦은 밤, 부모님과 통화를 하면서 A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했다. 부모님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이제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자꾸 생길 거야.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 보험 해달라는 친구, 다단계 하는 친구, 보증 써달라는 친구. 별의별 친구들이 다 나올걸."


부모님의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앞으로 제2의 A, 제3의 A 친구가 나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B 같은 친한 친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자꾸만 떠오르는 어릴 적 A의 얼굴이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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