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이었다. 날은 계속 더워지고 아이들은 점점 지쳐가는 상황에서 뭔가 분위기를 환기시킬만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바로 물총놀이! 초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교실에서 선생님 몰래 물총놀이를 하던 기억이 났다.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때 상당히 재미있었나 보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어른이 되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만한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물론 이번에는 선생님 몰래가 아닌 선생님과 함께인 활동이지만. ㅎㅎ
때마침 교과 진도도 거의 나간 상태라 물총놀이를 하기에는 적기였다. 아이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물총놀이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떻게 물총놀이를 할까 고민을 해보니,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아이들 옷부터 시작해서(특히 여학생들), 물총 종류, 안전 문제, 옷 환복, 학부모 동의, 동학년 선생님들 동의, 게임 방법 등등...
혹시 물총놀이를 한 초등학교가 있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꽤 있었다. 이 학교들을 참고해서 준비를 하기로 했다. 우선 옷 색깔은 속옷이 비칠 염려가 있으니, 어둡거나 짙은 색의 옷을 입히기로 했다. 물총은 친구들끼리 서로 성능이 다르면 위화감이 들 거 같아, 한 종류로 통일하기로 했다. 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총 중 쓸만한 물총 몇 가지를 한데 모아서 물살 세기, 물통 용량, 그립감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한 가지를 선정해 주문하기로 했다. 안전 문제의 경우에는 보통 눈에 물을 맞는 사고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과학실에서 보안경을 빌리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5~6교시에 물총놀이를 하고 바로 집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학원을 가야 하는 아이들은 운동장 바로 옆 1층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하고 말이다.
'이 정도 준비하면 동학년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님들도 동의해주시지 않을까?'
잔뜩 기대감에 부푼 채, 그 자리에서 바로 게임도 만들었다. 학창 시절 FPS(1인칭 슈팅 게임)를 하던 기억을 되살려, '거점 점령'을 하는 물총게임을 새로 만들었다.
게임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팀은 총 2팀으로 나뉘고, 각 팀에는 3개의 기지가 있다. 각 기지에는 총 3명까지 아군이 들어가서 수비를 할 수 있다. 각 기지의 가운데에는 주사위가 있고, 상대팀 기지의 주사위를 접시콘 라인 바깥에서 물총으로 쏴서 떨어뜨리면 그 기지는 아군의 기지가 된다. 각 팀의 주사위 색깔은 정해져 있고, 상대팀의 주사위를 떨어뜨리면 다시 아군의 주사위를 책상의 한가운데에 놓는다. 정해진 시간 동안 총 6개의 거점 중 가장 많이 점령한 팀이 이기는 게임이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물총놀이 얘기를 꺼내니,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전날 만든 게임의 대략적인 규칙을 알려주니, 역대급 게임이라면서 엄청난 기대를 했다. 혹시 몰라 물총놀이를 안 하고 싶은 학생을 조사하니 아무도 없었다. 지금 당장 게임을 하러 나가고 싶다고 난리였다.
"얘들아, 갑자기 분위기 깨서 미안한데... 아직 선생님이 다른 동학년 선생님들한테 동의를 못 받았어. 나중에 점심시간에 선생님들이랑 의논해보고 어떻게 할지 다시 알려줄게."
"왜 다른 반 선생님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냥 우리 반만 하면 안 돼요?"
아이들에게 왜 다른 반과 의논을 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일단 우리 학교에는 우리 반만 있는 것이 아니지? 우리 학년만 해도 총 9개 반이고. 근데 우리 반만 물총 놀이를 한다고 생각해봐. 다른 반 분위기는 어떻게 될까? 학교라는 공간이 다 같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니 이런 부분들은 서로 의논하는 게 맞다고 봐. 그리고 재미있는 활동은 같이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선생님이 웬만하면 꼭 할 수 있도록 다른 선생님들 꼭 설득해볼게."
그제야 아이들은 내 말에 수긍을 했다.
"선생님, 다른 선생님들 꼭 설득해주세요! 파이팅!"
점심시간이 되어, 동학년 선생님 8분께 물총놀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보았다.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를 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였다.
"분명 여학생 학부모님들은 물 때문에 속옷이 비칠거나 옷 갈아입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실 건데, 거의 100% 민원 들어올 거야."
"예전에 보니깐 물에 젖어서 감기가 걸리는 아이들도 있더라고. 감기 걸리면, 또 부모님들 난리 나실 걸."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분명 있을 거야. 억지로 물총놀이하게 하면 또 민원 들어올 걸?"
"물총을 제각각 준비해오면, 아이들끼리 위화감이 들지 않을까? 또 눈에 맞추거나 하면 난리 날 건데."
"예전에 옆 학교 하는 거 보니깐, 결과가 썩 좋지 않더라고. 이 더운 날씨에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요새 워낙 교사하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우려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수 없었다. 하나하나 대안을 말씀드렸다.
'옷을 어두운 색이나 짙은 색깔로 입으면 되고, 5~6교시에 물총놀이를 하고 바로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면 된다. 반에서 조사를 해보니 바로 학원을 가야 하는 학생들은 4~5명 정도였다. 이 친구들만 옷 갈아입을 수 있도록 신경 써주면 된다. 감기의 경우는 각자 수건을 챙겨 오면 될 거 같다. 저희 반의 경우에는 물총 놀이에 100% 찬성이었다. 하기 싫어하는 친구들은 중립 구역에 가서 있으면 될 거 같다. 물총은 제가 사비로 다 구입을 하겠다. 제가 구입한 것을 각 반 별로 돌려쓰면 된다. 이미 물살과 그립감이 괜찮은 것으로 봐 둔 것이 있다. 보안경을 쓰면 안전 문제는 해결될 거 같다.'
하지만 한 번 기울어진 선생님들의 마음을 되돌리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각 반에 찾아가서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음... 나는 괜찮은데... 다른 분들도 괜찮다고 하시면 우리 반도 참여해볼게!"
"선생님 말 듣고 보니 한 번 해볼 만한 거 같네요. 해봐요!"
각고의 노력 끝에 안전이 우려가 되는 한 반을 빼고는 나머지 여덟 반은 물총 놀이를 하는 것에 동의하셨다.
우리 반에 가서 결과를 알려주니, 완전 축제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사비로 물총을 주문했다. 생각보다 물총이 꽤 비싸서 깜짝 놀랐다. 개당 6500원이라니! (내년에도 사용해서 본전 뽑아야지...)
파란색, 보라색 딱 반반씩 배송이 왔다. 팀 조끼를 입어야 되나 걱정이 되었는데, 물총 색깔로 팀을 구분하면 될 거 같았다.
마침내 대망의 물총놀이하는 날이 다가왔다. 오전부터 아이들은 물총놀이를 한다는 생각에 한창 들떠 있었다.
"얘들아, 아무리 들떠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1~4교시 동안 오늘 선생님이 정해준 목표 달성 못하면 물총놀이 안 할 거야."
사실 며칠 전부터 물총놀이를 볼모 삼아서, 아이들이 싫어하는 과목 위주로 진도를 계속 나갔다. ㅎㅎ 아이들은 '물총 놀이를 할 수 있다면 이 정도 희생쯤이야!' 하는 분위기였다. ㅎㅎ
마침내 5교시가 되었다. 따로 얘기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자신의 팀 옷 색깔을 정해서 맞춤옷을 입고 나왔다. 게임을 이기기 위한 전략회의도 며칠 전부터 했단다.
드디어 대망의 물총놀이가 시작되었다.
기지를 지키는 사람(수비수), 상대방 기지를 공격하는 사람(공격수), 물을 채우는 사람 이렇게 역할 분담을 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기지를 빼앗겨도, 게임에서 져도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매일 공부만 하는 학교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노는 것 자체가 기쁨인 듯 보였다.
"근데, 선생님은 왜 안 해요? 교실에서 저희들한테 물총 실험한다고 막 쏘셨잖아요. 저희 복수해야 하는데..."
"안 돼. 선생님은 심판 봐야지. 너희들 사진도 좀 찍어주고... 으악!"
누군가 한 명이 나를 쐈고,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26명의 학생들이 나를 공격했다. ㅎㅎ 결국 나도 아이들과 함께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이 넘도록 게임을 즐겼다. 순간 나 또한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선생님, 한 판만 더하면 안 돼요?"
이미 집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무려 1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게임을 했는데도 한 판만 더하잖다... 아이들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언제나 감탄스럽다.
"안 돼. 지금 시간 봐봐. 재미있게 즐겼으면 뒷정리도 해야지? 뒷정리 제대로 안 하면 다음에는 이런 활동 없을 거야~~"
뒷정리 안 하면 다음번에는 이런 활동이 없을 거란 말에 화들짝 놀라 열심히 뒷정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반의 물총놀이는 마무리되었다.
우리 반을 시작으로 다른 반들도 물총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가 오는 날이 적어서, 방학식 전까지 8개 반이 모두 물총놀이를 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처음에 선생님들이 우려했던 사고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 아이들이 물총놀이를 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선생님들 또한 기분이 좋았다고 하셨다.
"선생님 덕분에 저희 반 애들 진짜 재미있게 물총놀이했어요. 감사합니다!"
"애들이 코로나 때문에 다양한 활동도 못하고 해서 안쓰러웠는데, 그래도 이번에 물총놀이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 보니 기분이 좋더라고.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
이번 물총놀이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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