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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un 17. 2023

#1 해외 초빙교사, 지원해? 말아?

지난해 10월, 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아이들, 언제나 신뢰와 믿음을 보내주시는 학부모님, 마음이 맞는 좋은 동료교사, 교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훌륭하신 교감, 교장 선생님.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열심히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고 퇴근 한 뒤 저녁시간에는 취미생활을 즐겼다. 바로 배드민턴! 기존에 하던 농구 말고 60대까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나에게 맞는 스포츠는 뭔가 하고 찾고 찾은 게 배드민턴이었다. 아내와 같이 몇 달째 레슨을 같이 받고 있는 중이었고 2023년 초에는 같이 대회도 나갈 계획이었다.


배드민턴을 가지 않는 날에는 작곡학원을 다녔다. 워낙 게으른 탓에 실력은 빨리 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곡은 꾸역꾸역 만들고 있었다. 곧 있으면 졸업식이기에 6학년 아이들을 위해 졸업식 노래를 만들어 음원으로 등록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의 삶이었다. 주변 내 친구들도 이러한 내 삶을 부러워했다.

"맘 편한 새끼. 부럽다 인마. 너 좋아하는 교육활동하고, 일찍 퇴근해서 저녁에는 또 취미생활 하고, 게다가 방학도 있고. 하... 부럽다. 부러워."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러한 내 삶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상태로 10년, 20년이 지나면 난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과 비슷할 거 같은 주변 동료교사 형들을 살펴보았다. 형들의 삶은 충분히 멋지고 존중받을 만한 삶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브런치에 썼던 나의 꿈에 관한 글 내용이 떠올랐다.

소외받는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만들고, 타인의 성장을 돕는 책을 쓰고 싶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모험가가 되고 싶다.


학교를 설립하고 책을 쓰고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려면 그만한 지식과 경험, 돈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환경설정으로는 정말 택도 없었다. 예전에 세운 목표들을 애써 무시하며 그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내가 부끄러워질 찰나 자의식이 발동되었다.

'괜찮아. 꿈은 꿈일 뿐이잖아. 남들 다 편안하게 사는데. 편안하게 사는 게 무슨 죄인가? 행복하고 좋잖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은 불편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내면소통을 한 결과, '지금의 삶은 단지 편안할 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아니다. 편안하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난 꿈들을 이루어내는 과정들이 행복한 삶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내 꿈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며칠을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해외 파견교사였다. 해외 파견교사라면 견문도 넓힐 수 있고, 환경이 달라지기에 기존의 안 좋은 습관들도 리셋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열악하고 도전적인 환경이기에 강제적으로라도 내가 성장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천성이 게으른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해외 파견교사에 대해서 한 번쯤은 관심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신규 때 내가 해외에서 멋지게 근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물론 상상만 하고 아무 행동도 취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교직경력 6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파견교사 관련한 공문들과 카페를 찾아보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외파견교사 모집인원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특히나 내가 희망하는 국가의 재외학교에서는 파견교사 모집이 아예 없었다. 대신 초빙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초빙교사는 파견교사와 달리 승진 가산점이 없다. 또한 월급도 상대적으로 적다. 대신 호봉은 인정해 준다. 승진 가산점도, 돈도, 파견교사의 명예도 필요 없는 나에게는 경쟁률도 적고 국가선택 범위도 다양한 초빙교사가 파견교사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였다.


'그래. 초빙교사에 한 번 지원해 보자.'


먼저 인기가 많은 베트남 쪽 학교들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별로 끌리지가 않았다. 한 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아 교육활동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베트남어를 쓰니 언어의 메리트도 딱히 커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높은 경쟁률도 한몫했다. 이번에는 일본을 찾아보았다. 음... 일본도 딱히... 그다음 중국. 으흠...


2~3시간 동안 재외국민교육기관 교사 카페를 둘러보면서 든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굳이?'였다. 내가 왜 굳이 생고생을 해가면서까지 저 먼 나라에 가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서류 준비나 면접들이 너무 빡세 보였고 교육환경들이 한국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해 보였다. 그에 비해 메리트는 적어 보였다. 도전을 싫어하고 게으른 원시인 유전자가 또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해외 초빙교사와 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진짜 생각 없어? 한 번만 더 고민해 봐."


아내의 말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카페를 들어갔다. 눈에 띄는 글이 하나 있었다. 중국에 있는 한 학교에 대한 글이었다.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여태 학교폭력사건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아이들도 착하다고 했다. 학생수가 적은 것과 방과 후 수업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뮤지컬 활동을 하면서 중고등학생들과 잘 지냈던 기억이 있기에, 중고등학생들과 같이 하는 활동들이 많은 것도 끌렸다. 여기라면 주변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교육활동들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마음에 들어 하자, 아내는 그 학교에 지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은근슬쩍 의중을 드러냈다. 사실 아내는 그동안 휴직을 간절히 원했다. 교직 경력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아내는 그동안의 교육 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좀 쉬면서 요즘 한창 집중하고 있는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다고 했다.


아내의 말에 살짝 흔들려, 모집요강을 확인했다. 어학자격증과 각종 경력을 적는 란이 있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훅 떨어졌다. 그 누구보다 교직생활을 열심히 하며 많은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왔지만, 정작 지원서에 적을만한 경력은 거의 없었다. 중국어 실력이 일천한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원서 마감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자기소개도 고민해야 하고 교장 선생님께 추천서도 받아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 보였다.


'그래. 이미 늦었어. 어학 성적이랑 부장 경력 추가해서 내년에 한 번 도전해 보자.'


그동안 하던 대로 나름 합리화를 하며 도전을 끝마치려는 찰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내가 1년 뒤에는 지원을 할까? 또 미루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 이제는 시기가 늦었다며 아예 도전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1년 동안 준비할 것을 3일 만에 준비할 수는 없는 걸까?'


밑져야 본전으로 과감하게 지금 도전을 해보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2022년 초 한국과 비슷하게, 당시 10월의 중국도 코로나 확산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한국 언론에서는 곧 중국이 망할 것처럼 떠들어댔다. 때문에 많은 선생님들이 중국을 기피할 것이고 경쟁률이 확 줄 거라고 예상을 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 타이밍이 프리패스의 기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또한 지금은 중국이 혼란스럽지만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중국 코로나 상황 또한 조만간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점을 달리하니, 위기가 나에게는 기회처럼 보였다.


30분 동안 아내와 고민을 한 뒤, 결국 그 학교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지원서와 추천서를 작성했다.


이제 다음 관문이 남았다. 바로 교장 선생님의 허락!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도무지 예측되지 않았다. 다음 날 잔뜩 긴장한 채 지원서를 들고 학교에 갔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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