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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Apr 23. 2023

아이의 귀여운 고해성사

초임교사 시절, 4학년 담임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 반에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가끔씩 아이들이 수업 태도가 좋을 때마다 보상으로 줬던 내 책상 서랍 안의 마이쮸가 일부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나는 다른 학생의 일기장을 통한 제보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바로 불러서 혼내는 것보다 아이가 스스로 반성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게 좀 더 교육적일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마이쮸를 훔쳐간 이 친구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때마침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요즘 우리 반이 도난 문제뿐만 아니라, 따돌림·이간질·욕설·거짓말 등 여러 문제들도 있었는데, 이것들 또한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꽤 괜찮아 보이는 방법이었다.   



점심 먹고 5교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의 물건(마이쮸)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무게를 잡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혹시 고해성사라고 알고 있니? 고해성사란 가톨릭에서 세례 받은 신자가 신부님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을 말해. 오늘 도덕시간에는 선생님과 함께 고해성사를 하려고 해."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즘에 우리 반에 문제가 많은 거 너희들도 알고 있지? 친구들끼리 매일 싸우고 욕하고, 선생님한테 거짓말도 하고... 그동안 너희들이 몰래 저질렀던 죄들 오늘 선생님한테 고백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하자. 선생님이 15분 정도 시간 줄 테니깐, 자신이 그동안 어떤 잘못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


15분이 지났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은 준 거 같아. 자, 모두 눈 감아볼까? 혹시 선생님이 준 시간 동안 자신의 잘못이 떠오른 사람?"


순간 정적이 흘렀다. 놀랍게도 단 한 명의 아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평소에 비행을 많이 저지르는 아이들 포함)이 '난 하나도 잘못이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마이쮸를 훔쳐 간 그 아이 또한 착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아무리 전부 눈을 감고 있다고는 해도, 이 많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들키고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데 손을 들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던 초임교사의 나에게 아이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실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 진짜로 너희들이 살아오면서 하나도 잘못이 없을까?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그 순간 갑자기 한 아이가 덜덜 떨면서 손을 들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수줍음이 많은 재현(가명)이었다. 재현이는 단 한 번도 반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욕을 하거나 나쁜 말은 쓴 적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재현이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교탁 앞으로 나왔다.


난 '갑자기 넌 왜 나왔어?' 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재현이를 쳐다봤고, 재현이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했다.


"선생님... 사실... (눈물) 제가 작년에 3학년 겨울방학 때, 이제 막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공부 안 한다고 엄마한테 심하게 혼났거든요... 그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제 방 안에서 'X발'이라고 했어요... (눈물 펑펑)"


"(당황하며) 혹시 부모님 앞에서 그랬던 거야?"


"아니요... 방 안에 들어가서 혼자 엎드려서 욕했어요. 근데 그때 욕한 게 자꾸 생각나고 엄마한테 미안하고, 제 자신도 너무 부끄러워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눈물 펑펑)"


"재현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네... 선생님한테 용기 내서 고백해 줘서 고마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앞으로 욕설 안 하면 되니깐 너무 죄책감 갖지 마."


"네... 선생님...(훌쩍)"




재현이의 고해성사 덕분이었는지, 내 마이쮸를 훔쳐간 아이도 하교 시간 이후 나를 찾아왔다. 우리 반의 제일 모범생인 지원(가명)이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순간 마이쮸가 너무 먹고 싶어서, 몰래 선생님 마이쮸를 가지고 갔어요. 그러면 안 되는데... (눈물) 계속 마음에 걸려서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다음부터는 절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을게요."


그 이후로 지원이는 정말로 나와의 약속을 지켰고,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모범적으로 학교 생활을 했다.



주변이나 뉴스에서 '요즘 아이들 영악하다, 못 됐다.'라는 얘기들을 많이 듣는다. 사실 나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난 그 시절의 귀여운 고해성사를 떠올리곤 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닐 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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