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년 임원들이 바뀌는 연속성이 없는 시스템으로는 지금의 어린이회와 같은 모습은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저학년 때 어린이회 구성원이었던 친구가 선배들에게 배우면서 해가 지나갈수록 학생회를 주도해 나가며 발전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 수는 없을까 고민해 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교장 선생님이 학기 초에 제안하신 대로, 전교회장, 부회장, 반장, 부회장 임원 시스템을 폐지하고 전교생이 참여하는 다모임 형태의 학생회를 만드는 것.
하지만 많은 반발이 예상되었다. 일단 학부모님들. 학교가 개교된 이래 계속 시행되고 있는 나름 전통이 있는 전교 임원 제도를 갑자기 없앤다면,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학부모님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안내장이나 학부모 간담회 등의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들. 그냥 가만히 놔두면 편안하게 유지될 학교 시스템을 건드려서, 안 그래도 많은 학교 일을 더 크게 만든다고 한 소리할 게 뻔했다. 나 또한 일이 늘어날 수 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일단 시스템이 갖춰지고 1~2년 동안 기반만 잘 다져놓으면, 교사가 크게 개입하지 않더라도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학생회가 될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기반을 다지는 1~2년이었다. 분명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들 게 뻔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아! 컵스카우트가 있었지? 컵스카우트와 학생회를 합치는 건 어떨까?
우리 학교에는 4~6학년 대상으로 하는 컵스카우트가 있었다. 1년에 6~7번 정도 주말 체험을 가는데, 계획 단계부터 체험 장소 및 버스 예약, 인솔까지 모두 교사가 진행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심지어 단원수는 고작 21명 정도에 불과했다. 전교생도 아니고 21명을 위해서 주말도 없이 일을 한다? 너무나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컵스카우트를 폐지하고, 다모임화 된 학생회에 컵스카우트의 체험적 특성을 녹여보는 건 어떨까 고민을 해보았다. 평상시에는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고 학생들을 위한 여러 행사들을 추진하는 학생회를 운영하고, 학기 중간이나 말에 고생했다는 의미로 체험 활동을 하는 학생회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1~2학년을 제외하고 토의, 토론이 가능한 3~6학년 대상으로 학생회를 꾸린다고 했을 때, 최소 40명 이상은 모일 것이었다. 현재 컵스카우트 인원의 2배였다. 선생님의 시간과 노력은 이전과 그대로인데, 혜택을 받는 학생수는 두 배로 늘어나니 학생회와 컵스카우트를 안 합칠 이유가 없을 거 같았다.
내가 생각한 컵스카우트와 합쳐진 새로운 학생회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교회장, 부회장, 반장, 부반장 같은 위계가 사라져 아이들 사이의 위화감이 사라진다. 1년 동안 전교 어린이회를 운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임원들의 비임원 아이들에 대한 배척이었다. 예를 들어, 임원 중에 영상편집을 잘하는 학생이 없어, 비임원 아이 중 영상 편집을 잘하는 학생 한 명이 학생회 활동에 도움을 줬는데, 왜 임원도 아닌데 이 친구가 학생회 활동에 참여를 하냐고 강하게 반발을 한 일이 있었다.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되지 않아 고작 임원숫자가 15명 밖에 되지 않는 일손이 부족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임원 아이들은 자신들 만의 무언가 특별함을 원하며 비임원 아이들을 배척했다. 하지만 임원 제도 자체가 사라지면 이런 위화감도 사라질 터였다.
둘째, 배움에 연속이 생긴다. 기존에는 한 학기만 지나면 다시 바뀌는 임원 시스템 때문에, 교육의 연속성이 었었다. 무언가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매 학기마다 제자리걸음이었다. 하지만 다모임 시스템으로 바뀐다면 3학년 아이들이 6학년이 될 때까지 선배들과 선생님께 배우면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시스템이 정착될수록, 학생 자치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선생님이 일일이 다 지도를 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어질 것이었다. 진정한 학생자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셋째, 혜택 받을 수 있는 학생 인원이 확대된다. 다모임 형태의 학생회는 3~6학년 전체 학생이 참여를 하기 때문에 기존의 15명의 임원 중심의 학생회 2배 이상의 인원이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컵스카우트의 체험적 성격도 학생회에 추가되기에, 훨씬 더 풍성한 체험 혜택을 많은 학생들이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건의드리기 전에, 이러한 나의 생각을 먼저 전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작년에 나와 같은 일을 했기에 그 고충을 가장 잘 알거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 생각은 나쁘지 않은데, 학교 시스템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학부모들이 가만 안 있을 걸? 그리고 지금 현재 시스템은 말이야. 우리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이 예전에 여기 와서 만든 거야. 10년 전에는 재외학교 경쟁률 엄청 셌던 거 알고 있지? 그분들이 다 깊은 생각이 있어서 만든 거라고.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더 좋은 선택일 수도 있어."
"..."
아... 이런 분들 덕분에 그동안 학교가 변하지 않았구나... 이 학교가 변하지 않고 10년, 20년 전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전임자 선생님의 얘기를 흘려듣고, 다음 날 교장 선생님께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내 의견에 대찬성하셨다.
"교실남 선생님, 안내장만으로는 학부모님들께 설명이 어려우니깐 다음 주 즈음에 학부모 간담회 열죠."
"헉... 간담회요?"
간담회를 열자고 말씀하실 줄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간담회는 부담스러웠다. 최소한 40~50명 정도의 학부모님들이 오실텐데 과연 내가 그 앞에서 설명을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군대 조교 시절 1000명이 넘는 훈련병 앞에서 항상 자신감 있게 연설하던 나였지만, 학부모님들 앞에서는 뭔가 부담스럽고 작아지는 나였다.
하지만 학교 시스템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바로 간담회 준비를 하겠다고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이후 간담회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동안의 전교 어린이회, 컵스카우트 활동 사진과 장단점을 넣은 PPT를 완성하고, 학부모님들이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준비했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학부모님들에게 내 진심을 보여드린다면 충분히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일주일 뒤,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학생회와 컵스카우트 담당교사 교실남입니다. 와... 이렇게 많은 학부모님들 앞에서 얘기하는 건 처음인데요. 정말 떨리네요. (웃으며) 혹시 응원 박수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박수!"
학부모님들의 응원을 받고 떨림이 많이 줄었다. 먼저 그동안에 했던 학생회와 컵스카우트 행사들을 학부모님들께 찬찬히 보여드렸다. 먼저 컵스카우트의 1박 2일 학교 야영, 승마, 서바이벌, 동물원, 방방장 체험 등 1년 동안 활동한 사진들을 보여드렸다.
그리고 1, 2학기 임원수련회, 윷놀이, 학교 홍보, 간담회, 회의 등 1년 동안에 했던 학생회 활동 사진들도 보여드리며 설명드렸다.
사진을 보여드린 이후에는 컵스카우트와 학생회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드렸다. 말을 하면서 학부모님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대부분 흐뭇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에 공감을 해주셨다. 특히 내가 담임으로 있는 5학년의 학부모님들은 마치 '선생님이 추진하는 거라면 무조건 믿고 따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신뢰의 눈빛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안심하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그래서 저는 기존의 학생회와 컵스카우트의 장점만을 합친 다모임 형태의 학생회를 학부모님들께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중략) 전교생이 참여하는 학생회, 체험 활동을 많이 하는 학생회, 아이들 간에 위계가 없는 평등한 학생회, 진정으로 학생 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학생회를 책임지고 만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이의제기는 없었다. 내가 제안한 새로운 시스템이 통과가 된 것이다! 교장 선생님과 담당 부장 선생님도 매우 만족하신 표정이었다.
간담회가 끝나고 부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실남 선생님의 진심이 학부모님께 통한 거야. 그동안 교실남 선생님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온 것들이 있잖아. 그게 다 쌓이고 쌓이면서 학부모님들의 신뢰도 함께 쌓인 거지. 멋지다, 교실남"
그렇게 학생회는 바뀌게 되었다. 다음 해에 나는 부장이 되었지만, 학부모님들과 약속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학생회 업무를 계속 들고 갔다. 학생회 규모는 전보다 2~3배 이상 커졌고, 예산 또한 많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다수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갔다. 3~4학년 후배들은 행사를 보조하면서 선배들에게 배우고, 5~6학년 선배들은 학생회의 중심이 되어 행사를 이끌어나갔다.
아이들은 정말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했다. 임원 수련회, 물총놀이, 윷놀이, 환경 골든벨, 영상 대회, 각종 홍보, 식물 키우기 대회, 크리스마스 행사, 진로체험, 방학식 진행, 학예회 진행, 학교 야영, 보물찾기 등 행사의 기획, 물품 주문, 실행까지의 대부분을 학생회 아이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이끌어갔다. 진정한 학생 자치가 실현이 된 것이다. 내가 만든 시스템 아래, 열심히 활동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고 흐뭇해졌다.
누군가가 2년 동안 재외한국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잘한 일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학생회를 바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나 스스로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