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 스승의 날 전후로, 10년 전 첫 제자부터 작년 제자까지 많은 제자들에게 감사 연락이 왔다. 첫 제자이자 애제자인 성우와 지안이도 연락이 왔는데, 이 둘은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2년 전 전화통화 이후 처음이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작년에 아이들이 대학 입학한 것을 알고 있기에 어디 대학에 들어갔는지 물었다. 둘 다 초등학교 때도 모범생이었고, 성우는 과학고, 지안이는 예고였기에 당연히 대학을 잘 들어갔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둘 다 학교를 잘 못 갔다.
[선생님, 몇 년 동안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계속 심리 치료받았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계속 연락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지금은 괜찮아? 학교 생활은 어때?]
[지금은 거의 다 나았어요. 학교 생활은 진짜 재미있게 잘하고 있어요. 요즘에 즐거워요.]
[그래, 네가 즐겁고 행복하면 됐어. 선생님은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건강하렴.]
성우와 지안이 둘 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 아이들의 실력이나 재능에 비해, 대학을 잘 못 간 거 같아서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동안 마음이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고, 이젠 괜찮아졌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저 현재 즐겁고 행복하게 지낸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뻤다. 제자가 좋은 대학을 갔나, 안 갔나, 성공했나, 성공하지 않았나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 중3 때 담임 선생님인 천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선생님은 항상 스승의 날 때마다 생각나는 선생님이었다. 천선생님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에 반 친구들 몇 명과 같이 새벽에 운동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걸 들은 선생님께서 5시에 체육관으로 배드민턴을 치러 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우리는 몇 주 동안 선생님께 배드민턴 레슨을 받았다. 분명 선생님도 본인 운동이 하고 싶으셨을 텐데, 따로 시간을 내서 우리들을 열심히 지도해 주셨다. 요즘 세상 같으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체육 선생님이 인기영합주의와 귀차니즘으로 아나공(아이들한테 공을 던져주고 아이들끼리 체육을 하게 하는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천선생님은 교육과정에 맞춰 정석대로 수업을 진행하셨다. 단 한 번도 아나공을 한 적이 없으셨다. 하지만 자유시간 없이 고지식하게 수업을 하는 부분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체육수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존경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같은 교육자로서도 정말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천선생님에게 연락하는 것을 망설여왔다. 혹시나 천선생님이 현재 나의 모습에 실망을 하실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최고 에이스 교실남, 넌 꼭 큰 어른이 될 거야. 선생님이 항상 응원할게.]
난 우리 중학교에서 최고 유망주였다.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나름 에이스였다. 외고에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이 손수 고등학교 원서를 봉투에 동봉해 주시면서 넌 큰 어른이 될 거라 말했던 순간들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에이스였던 나는 외고에 들어가서 된통 깨졌고, 약한 멘탈과 노력 부족으로 인해 끝내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교대에 입학한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나에 대해 엄청 실망하실 거 같아서 두려웠다. 그렇게 나중에 성공해서 연락드릴 거라 다짐하며 1년, 2년, 3년 천선생님께 연락드리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벌써 18년이나 흘러 버렸다.
얼마 전에 온 제자들의 연락을 곱씹어보며, 선생님으로서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경우, 제자가 기대보다 성공을 하지 못했더라도, 그냥 잘 지내고 있고 행복하다면 좋지 않았던가? 천선생님 또한 나와 마음이 비슷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18년 만에 천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기로 결정했다. 중학교 동창 친구에게 선생님의 연락처를 물어봤고, 불과 5분도 안 돼서 연락처를 구했다. 이렇게 빠르게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면 진작 연락해 볼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 18년 전 00중 제자 교실남입니다. 혹시 기억하실까요? 이제야 연락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혹시 나중에 통화 가능하실까요?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셔요 ^^]
2시간 즈음 뒤에 연락이 오셨다.
[그래 반갑고 보고 싶구나~ 근황은? 퇴직 후 소일거리로 나날을 보낸다.]
[저는 지금 초등교사로 일하고 있어요~ 선생님과 같은 교직 길 걷고 있습니다! 나중에 수업 마치 4시 40분 즈음 전화 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약속한 시간이 되어 전화를 걸었다. 천선생님께서는 연락을 기다리셨는지, 바로 전화를 받으셨다. 연세가 60이 넘으셨지만, 목소리는 예전과 비슷하셨다.
예상대로 선생님은 어떻게 교대에 들어가게 됐는지 물어보셨다.
"어떻게 교사가 되기로 결정을 한 거야? 선생님은 네가 초등교사 하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너는 훨씬 더 큰 일을 할 줄 알았는데. 네가 우리 학교에서 최고였잖아."
"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하."
"그래서 지금 직업에는 만족하고? 재미는 있어?"
"엄청 재미있게 생활하고 있어요. 제 적성에도 잘 맞고요. 아이들이랑도 잘 지내요."
"그래, 선생님은 네가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네가 즐겁게 살고 현재에 만족하면 선생님도 좋아."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제야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선생님과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여러 추억들과 근황들을 얘기했다. 선생님은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다 기억하고 계셨다.
"그래, 교실남아. 00 근처에 오면 연락해. 선생님이랑 밥 한 끼하자."
"넵!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18년 만에 연락을 드렸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말 연락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학창 시절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기 망설이시는 분들이 있다면, 연락하는 걸 추천한다. 언제든 선생님은 연락 오는 제자들을 기꺼이 반길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