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생님을 울린 초등학생의 발표

by 교실남

네 번째 이야기는 코로나 시기 6학년 국어 수업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작년 학기 초 6학년 국어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수업의 학습목표는 그동안 배운 속담들을 모아서 속담 사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각자 간단하게 속담사전을 만들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자! 먼저 발표할 사람?”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습니다.


‘하... 이놈들이 5학년 때는 안 그러더니 결국 6학년병에 걸리고 말았구나!’


6학년병이란 제가 학창 시절 발견한 병으로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부터 남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감과 의욕이 하락하게 되어,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변하는 병을 말합니다. 이 병은 매우 전염력이 강하여, 순식간에 학급전체 분위기를 다운시키기도 합니다. 6학년병의 증상이 심해지면 수업시간에 소극적으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에게도 눈치를 주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학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학급 문화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6학년 병은 한 번 걸리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직장까지 영향을 미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지 않은 학생이 어른이 되어서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이미 6학년병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치료제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치료제는 다름 아닌 ‘마음껏 발표를 할 수 있는 환경설정’이었습니다.


“얘들아! 우리나라 대부분 학생들이 걸려 있는 병이 있어. 6학년병이라고... 저번에도 선생님이 말했었지. 근데 지금 너희들이 그 병에 걸려 있는 거 같아...”


(머쓱하게 웃는 아이들)


“선생님이 지금 너희들의 마음속 생각을 한 번 맞춰볼까? 혹시 내가 실수하면 친구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아니면 혼자 나댄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아이들도 몇몇 보였습니다.

“얘들아. 틀려도 괜찮아. 좀 못해도 괜찮아. 계속 실패하면서 성장하는 거야. 그리고 이건 좀 확실히 하자. 앞으로 우리 반에서 발표도 열심히 하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친구보고 '쟤 또 나댄다.' 이런 생각하기 절대 없기! 앞으로 우리 반에서 발표를 많이 하는 친구는 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멋진 친구라고 생각하자!”


순간 몇몇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질문했습니다.

“그럼 자신과 반을 위해서, 한 번 발표해 볼 친구?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고~”



몇몇 아이들이 용기를 내서 손을 들었습니다. 한 명, 한 명씩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아이들의 발표 실력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목소리도 작고, 시선처리도 불안하고, 자신감도 없어 보였습니다. 발표하는 내내 본인이 가져온 발표 종이만 보면서 얘기하다가, 마무리도 제대로 안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발표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몇 가지 발표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멋지게 발표하는 방법 알려줄게! 일단 나와서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무슨 주제로 발표를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을 해. 자신이 발표하는 내용은 당연히 종이를 안 보고도 말할 수 있어야겠지? 시선은 선생님을 바라보지 말고 친구들을 바라봐! 지금 발표 대상은 선생님이 아닌 친구들이잖아. 그리고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로 크게, 말 속도는 너무 빠르게 하지 말고!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발표를 하면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올 거야. 지금 앉아 있는 친구들은 나라면 친구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 발표할까 한 번 이미지 트레이닝 해보면 실제 발표할 때 큰 도움이 될 거야.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마무리야. '이상 ~~~ 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마무리만 해도 충분히 깔끔한 발표가 될 수 있어. 마무리는 꼭 신경 써줘야 돼!”


“자! 이제 선생님이 말한 것들을 적용해서 발표해 볼 사람?”


다시 교실이 조용해졌습니다. 아이들의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기존에 하던 대로 발표하는 것도 힘든데, 저 많은 것들을 지키면서 발표하는 것이 분명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얘들아, 이것도 다 연습이야. 실수해도 괜찮아. 선생님도 예전에 초등학생 때는 되게 발표 못했어...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면서 실력이 느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발표 실력일 거야. 어른이 되어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못해 망신을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좋은 기회에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발표 연습해 보는 게 훨씬 낫지 않니? 그리고 좀 못해도 어때? 어차피 지금 여기 있는 친구들 다 발표 못하는데~ (웃음)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깐! 선생님 믿고 한 번 도전해 봐!”

'할까, 말까'하면서 갈등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보였습니다. 입으로 중얼중얼 거리며 아까 가르쳐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몇몇 보였습니다.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제가 트리거(trigger)가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발표하겠다고 손을 들지 않았음에도 그 눈빛을 보고 그냥 시켰습니다.


“오! 그래 현석이 용감하네. 나와서 발표해 보자!”

“네?! 제가요?”


말은 '네?!' 하면서도 선생님이 부르자마자 바로 교탁 앞으로 나오는 현석이. 발표 종이를 봤다가, 친구들을 봤다가 하면서 손을 덜덜 떨면서 열심히 발표를 했습니다. 역시나 아까부터 제 말을 듣고 속으로 계속 연습을 했음이 분명했습니다. 대견했습니다.


현석이의 발표 이후에는 봇물 터지듯이 손을 드는 아이의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사람마다 말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친구들에게 다른 피드백을 주었습니다.

“흠... 광수 너는 재미있으니깐 중간에 유머를 하나씩 섞어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아까 발표할 때, 처음에 친구들이 안 웃었는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드립 친 거 좋았어. 원래 개그는 반복이거든(웃음). 방금 발표 정말 잘했어!”


“하온이는 말이 엄청 느린데, 그걸 장점으로 삼으면 되겠다. 말이 느리면 침착해 보여서 듣는 사람한테 신뢰감을 줄 수 있거든! 대신, 자신감 있는 표정과 시선처리 신경 쓰도록!”


“효은이는 평소에 조용해서 목소리가 엄청 작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목소리도 크고 발표도 잘하네? 너는 이걸 반전포인트로 삼아도 될 거 같아. 아마 네가 발표하면 사람들이 너의 매력에 깜짝 놀랄 거야. 조금만 더 목소리를 키우고 자신감만 더 키우면, 아마 너의 반전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거야!”


한참 아이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재한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재한이는 4학년 때에도 저와 같은 반을 했는데, 당시에 자진해서 발표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작년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니 작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자기는 만사가 귀찮고, 학교 다니는 게 너무 싫다고,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르겠다던 회의적인 친구였습니다. 그런 재한이가 처음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느껴졌습니다. 이 친구가 얼마나 큰 마음을 먹고 손을 들었는지. 재한이는 쭈뼛쭈뼛 친구들 앞에 걸어 나와서 발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한이의 발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재한이는 방금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피드백 줬던 내용들을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손을 덜덜 떨면서, 친구들과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까 제가 친구들에게 피드백을 주고 있는 동안, 머릿속으로 계속 연습을 했음이 분명했습니다. 2년 반 동안 재한이를 지켜봐 왔고, 재한이가 그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교를 다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의 박수를 받고 뿌듯해하는 재한이의 모습을 보고 결국 눈물이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깨트린 모습이 너무 대견했고, 무엇보다 항상 힘이 없고 의기소침하던 재한이가 이번 기회로 성장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 같아 기뻤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작년부터 같은 반이었던 지윤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또 울어요? 선생님은 너무 감수성이 풍부한 거 같아요.(웃음)”

“음... 선생님은 진짜 웬만해서는 안 우는데...(훌쩍) 이상하게 너희들이 스스로 한계를 깨트리고 이렇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나더라. 앞으로도 너희들이 선생님을 좀 많이 울려줬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줘서, 성장해 줘서 고맙다. 얘들아.”


변화와 성장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5년 내내 학교 생활에 소극적이었던 재한이는 그 수업 이후로 매 수업마다 본인의 한계를 깨는 발표를 시도했고, 나중엔 저희 반의 발표왕이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 또한 6학년병에서 벗어나 수업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긍정적이었던 것은 반전체의 분위기가 바뀐 것입니다. 예전과 달리 아이들은 발표를 할 때 실수한 것에 부끄러워하기보다 도전한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친구들을 응원하는 학급 문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4학년 저학년 교실에 가면, 수업 시간에 너도나도 발표를 하고 싶어서 손을 드는 아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도 5학년이 되면서부터 주변을 의식하면서 발표를 꺼리기 시작합니다. 6학년 병의 전조증상이 나타난 것이죠. 6학년이 되면 정말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발표를 잘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발표를 하는 아이들이 '나대는 아이'라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병의 증상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까지 계속 지속이 됩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들도 6학년병에 걸려 있지는 않으신가요? 6학년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한이처럼 한 번 용기를 내보는 건 어떤가요?

keyword
이전 04화왕따에서 전교부회장까지 변할 수 있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