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갓 Apr 21. 2020

역할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이 세상이 하나의 드라마나 영화, 연극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맡은 배역을 소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대학생 때 학과 내 연극 동아리에서 잠깐 활동했었다(연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발연기가 싫어서 그만두었다). 그때 ‘흑설공주’라는 이야기로 10분 연극제에 나가게 되었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블랙 코미디 극이었다. 그중 나는 난쟁이 2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연출을 맡았던 선배가 숙제를 내주었다.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써오라고 했다. 정해진 양식은 없었다. 자유롭게 써오면 돼.

 백설공주, 흑설공주, 왕비, 왕자, 거울, 난쟁이 1과 2. 우리는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썼다. 나도 공책 두 페이지 정도의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물론 내가 그들 중 가장 길게 썼다). 난쟁이 2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까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다들 내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어했던 것 같다. 선배도 처음에는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나서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은 좋지만, 각자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는 말을 했던 것 같다(아마도 그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다).

 10년 하고도 조금 더 지난 이야기인데,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아니,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9살에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90살이 넘도록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일을 겪었을 때 대다수가 대처하는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는 부와 명예 사랑을 좇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자신이 가진 조그만 것조차 나누어 준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것이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군가는 그 역할을 충실이 소화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이 더욱 빛날 수 있는 법이니까. 사실 그런 역할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빛나는 조연이란 사실 그리 빛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감독이었다면, 주인공보다 오히려 그런 역할을 캐스팅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누가 나를 캐스팅한 건지 궁금하기는 하다.


작가의 이전글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