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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갓 Apr 21. 2020

피아노 치는 소녀

3화

 서서히 해가 저물고, 연보랏빛 하늘에 섹시한 초승달이 떴을 때 나는 카페를 나섰다. 밥을 먹을까?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오후 내내 내리쬐던 열기가 식기 시작하고, 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살랑 나를 간지럽혔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은 날씨였다.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배가 더 고파질 때까지 걷기로 했다.

 거리는 날씨만큼이나 생기가 넘쳤다. 연인들은 사랑에 넘치는 얼굴로 길가에 있는 식당이나 카페, 술집으로 저마다 흩어져 들어갔다. 부모의 손을 하나씩 잡고, 해맑게 웃으며 장난감 가게로 들어가는 아이.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통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머니.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조금 더 걷다 보니 길 우측 편으로 작은 책방이 보였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정사각형 모양의 서점은 중앙에 카운터가 있고, 벽을 둘러 책장이 둘러서있는 구조였다. 입구에서 한눈에 가게 전체가 눈에 들어올 만큼 작은 서점이었다. 서점 안쪽 양 모서리에 두 사람이 서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인상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는 서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겼다. 나는 이렇게 책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책장을 넘기는 일 자체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가게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응? 아까부터 음악이 흘러나왔었나?’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나는 다시 책 읽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음악이 신경 쓰여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 연주곡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곡이었다. 이상했다. 나는 클래식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는 곡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책 읽기에 열중이던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저, 사장님. 혹시 지금 이 곡이 쇼팽 발라드인가요?” 그러자 아저씨가 책 읽기를 멈추고,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맞소. 쇼팽 발라드 1번. 클래식을 좋아하나 보군.”

 “아, 아닙니다. 그냥 최근에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서요. 사실 클래식은 잘 모릅니다.”

 “클래식에 알고 모르고가 어디 있나? 그냥 느끼면 되는 거지.” 아저씨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나는 아저씨의 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생각했던 클래식이라는 것의 정의가 완전히 새롭게 뒤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클래식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도 적지. 허허.” 아저씨는 나를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떤가? 시간 있으면 저녁이나 먹으면서 이야기나 하겠나? 어차피 이제 마칠 시간도 되었고.” 아저씨는 왼손을 살짝 들어 짙은 갈색 가죽 손목을 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아저씨에 대한 경계심은 생기지 않았다.

 “네? 이야기요?”

 “그래. 이야기. 이야기라고 해봐야 그냥 세상 사는 이야기지. 뭘 그리 놀래나?”

 “아, 아닙니다. 네,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작은 서점이란 원래 이런 걸까? 딱히 정리랄 것도 없었다. 그냥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셔터를 내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저씨는 그렇게 퇴근 준비를 하고,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뒤따랐다. 갑자기 왜 아무런 말이 없지, 하고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갔다.그리고 우측 편에 있는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판도 없는 작은 가게라 무엇을 파는 식당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와 음식 냄새(그리고 아저씨와 밥을 먹으러 온 것이기도 하고)만으로 그곳이 식당이라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생각한 대로 작은 식당이었다. 왼쪽 벽면으로 주방이 있고, 주방을 경계로 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 손님이 거기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주방에는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분주히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 오른쪽으로는 나무로 된 4인용 원형 테이블 두 개가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큰 특징이랄만한 게 없는 가게였다. 아, 오른쪽 벽면에 음악가(어린 시절 음악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 초상화 몇 장이 붙어 있었는데, 그런 게 이 가게에 붙어 있으니 뭔가 엄청 특별하게 느껴졌다. 나는 신기한 듯 초상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제일 왼쪽, 그 사람이 쇼팽이야.” 아저씨가 원형 테이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나는 쇼팽 초상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발라드 1번을 떠올렸다. 아니,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맞다.

 “맥주 한잔하게 알아서 부탁해.” 아저씨는 칼질을 막 시작한 아줌마에게 말했다.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기는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시 후 그녀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이는 생맥주 두 잔을 들고 왔다.

 “술 괜찮지?” 아저씨가 맥주 한 잔을 나에게 슥 밀면서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나는 가게 전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가 나에게 쇼팽을 보여주려고 여기로 데려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건 핸드폰으로 검색하면 바로 나올 텐데. 그때 주인아줌마가 무심한 얼굴로 음식을 테이블에 놓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저씨는 그녀의 시크함이 익숙한 듯 잠깐 음식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었다.

 “자. 한잔하지.” 나는 잔을 살짝 부딪히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빈속에 얼음장 같은 맥주가 들어가니 냉기가 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시원함을 넘어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먹어볼까?” 나는 그제서야 음식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만두 네 개와 소시지 야채볶음이었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져서 그런지 군침이 돌았다. 아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군침이 돌았을만한 그런 비주얼이었다. 나는 먼저 만두를 집어먹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쫀득, 부드러운 식감이었다. 육즙이 입안에 감돌았다. 정말 저 아주머니가 이것을 만들었다고? 그녀는 여전히 시크한 표정으로 분주히 주방을 왔다 갔다 했다.

 “어떤가?” 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맛있네요. 만두야 다 비슷할 텐데, 이렇게 맛있는 만두는 처음 먹어봅니다.

 “저 아줌마가 서비스는 영 엉망이지만, 솜씨는 기가 막히지.” 역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비슷한가 보다.

 “나도 한때는 음악을 했었지.” 그는 과거를 회상하듯 맥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왠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잔을 들었고, 우리는 다시 한번 잔을 살짝 부딪혔다.

 그는 중학생 때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다고 했다. 물론 그전에도 음악이란 것을 접하기는 했겠지만 아마 본격적으로 음악을 느끼기 시작한 때를 의미할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던 그는 우연히 교내 관현악단의 합주를 듣게 되었고, 왠일인지 음악의 매력에 빠져들어, 그 길로 관현악단에 들어가 연주를 배웠다고 한다. 그중 금관악기의 매력에 빠져, 지금도 가끔 모임에 나가 색소폰 연주를 한다고 했다. 그는 음악가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 혹은 그 비슷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 일어날까?” 그가 다시 말을 꺼냈을 때 우리의 접시는 모두 비어 있었다. 나는 조금 남은 내 맥주잔을 비우고,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즐거웠네.” 그가 행복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맛있는 저녁도 먹고.” 진심이었다.

 “심심하면 종종 놀러 오게. 나는 가진 게 시간뿐이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한 손을 들어 흔들고는, 쿨하게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이미 사라져버린 그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걸었다. 거리 공연을 하는 무리를 지나, 강가 산책로를 걸었다. 그리고 집 근처 놀이터를 지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놀이터 벤치에는 젊은 커플이 은밀하게 서로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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