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
또다시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주말이 찾아왔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는데 모든 것이 낯설다. 몸을 일으키는데 화장실도 싱크대도 현관문도 아득히 멀어 보인다. 몸이 천근만근인가 보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입구도 너무 높아 보이고, 세면대도 너무 높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세면대 위로 뛰어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거울 속에는 넋 나간 표정의 고양이 한 마리만 보일 뿐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이 놀랍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던 것처럼 능숙하게 내 방 창문으로 빠져나와 집 근처를 돌아다녔다.
고양이의 시선이라고 해서 딱히 풍경이 다르지는 않았다. 저 멀리서 다른 길고양이들이 가끔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빼고.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사람들의 생각들이 그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녀석도 이렇게 내 생각을 읽은 거구나.’ 아니, 들었다고 해야 하나?
‘아, 내일이면 서류전형 합격자 발표네. 면접은 준비를 안 했는데 합격을 해도 문제네.’ 트레이닝복 차림에 안경을 낀 대학교를 갓 졸업한 듯 보이는 남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 앞에 찾아가서 서프라이즈로 꽃 선물을 하면 정말 좋아하겠지?’ 그 생각의 주인공은 전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정장을 쫙 빼입은 남자였다.
주말에 연락도 없이 여자친구 집에 깜짝 방문한다고? 내가 고양이만 아니었어도 그를 말렸을 텐데.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고양이로 변해도 그건 변하지 않네. 내가 고양이로 변했다는 사실보다 고양이로 변해도 바다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게 더 신기할 뿐이었다.
‘직접 운전을 못하는 건 조금 불편하네.’ 그리고 나는 신호 대기 중이던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아쉽지만 양양까지 가는 건 무리겠군.’
그렇게 몇 번의 환승 끝에 나는 바다가 아닌 한강 근처에 도착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차들로 빽빽한 교각 위였다. 마포대교인지 원효대교인지 TV에서 보던 어느 다리 중 하나겠지. 그곳에서 나는 해가 질 때까지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젊은 남자처럼 보였는데 어두워서 생김새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남자의 생각이 들려왔다.
‘신기하네. 어떻게 하든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참 신기해.’
‘내가 여기서 뛰어내려도, 뛰어내리지 않아도 달라질 게 없다니. 하품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지루한 인생이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그를 향해 열심히 울어댔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내 울음소리는 인간들에게는 귀엽게만 들릴 것 같았다. 그 남자는 그저 다리 아래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천천히 난간을 넘어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난간 바깥쪽에 섰다. 그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는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나였다. 그리고 그는 난간을 잡고 있던 두 손을 서서히 놓기 시작했다.
- 고양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