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편집장이 되었다고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때, 같은 축구팀에 있던 한 동생이 반농담조로 말했다. "그런거 아이다 "라며 웃어 넘겼지만 그의 말은 아마 매거진 편집장을 바라 보는 보편 일반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묘사되는 편집장의 이미지는 까칠하고 깐깐하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한 권의 매거진을 만든다는 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온 몸의 세포를 활성화해야 하는, 극도로 예민하고, 그래서 셔터를 내리는 순간 정신도 같이 내려지는 지난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우리 같은 매거진에서 에디터는 책을 만들 때에나 에디터이지, 평시에는 기자로서 살아 가기 때문에, 매거진 제작 기간이 돌아 오면 기자들을 다시 에디터화시키는 동기화 과정이 필요하다.개성 강한 기자들에게 왜 이 작업은 이래야 하는지 일일히 설득시켜야 하고, 반대로 설득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편집장이라는 서열상 위계를 드러내며 강력하게 푸시해버리면, 그걸 받는 기자는 겉으로는 마지 못해 수긍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납득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진다. 그러면 아무리 상사의 지시로 사안에 결론을 내렸다고 해도 이상한 찜찜함을 감출 길은 없다. 그건 결국 사디즘적 지시였던 거다.
사소해 보이는 의제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 신경 쓸 일이 늘어날 때면 '까라면 까야'했던 도제식 시스템과 상명하복의 매거진 문화가 참 단순하고 편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그건 '네오 꼰대'로 진화하여 또 다른 괴물이 되어 버리는 테크라는 생각에 두 뺨을 때린다.
그렇다고 지나친 민주주의의 정신을 발휘하면 그건 그 나름대로 구성원들이 피곤해지는 일이기에, 어느덧 고참급에 속해버린 모 후배 기자는 "선배, 어느 정도는 독선적으로 해주세요. 그래야 저희도 편합니다"라며 조언을 건넨다. 그러나 그 말의 절반은 '너무 그러지는 말아 달라'라는 뜻인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독선의 의미를 '소량의 독과 다량의 선'으로 속편하게 해석해버린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악마로 빙의한 편집장은 프라다라는 사치재를 두르고 신경질적인 딱다구리마냥 동료들을 닥달하고 쪼아대며 '똑 부러지게 일 잘한다'는 이미지를 얻는다. 마이크로 디렉팅과 매니징의 가혹한 전리품인 것이다.
모 후배 기자가 우리 모두의 신세를 한탄하여 세계적 패션 매거진 <보그>지 편집장 연봉을 검색해보니 24억 원인가 그랬다(현타가 너무 오므로 2.4억 원을 잘못 본거였기를). 코로나로 20프로였나삭감되었다는 기사였는데, "그래도 십 몇억은 되겠네" 하며 쓴웃음을 교환하곤 했더랬다.
그 정도면 기꺼이 영혼을 판 악마가 되겠노라던 후배들의 볼멘소리에 무기력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나저래나 변함 없는 사실은 '이 현실에서는 착한 편집장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는 거. 아무리 돈 많이 받아도 떽떽거리며 사방팔방 쪼아대는 편집장이 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글쟁이는 배고파야 한다', '배 부르면 글이 안 나온다' 따위의 꼰대 국문학도 선배 같은 이야기는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다. 편집장이 악마도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려 영업 리스트를 뒤지는 게 더 도움이 될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