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의 목적은 ‘어른 몸속에 갇혀있는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엄마 몰래 상담실에 왔다는 소연은 자신이 80세 노인이 되어도 아이 같을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래요?” 상담실의 소파 끝에 겉터 앉은 그녀에게 물었다. 사정은 이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들어간 회사. 그런데 동료들과 점점 멀어지는 자신이 싫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점심시간이면 동기들과 밥을 먹으러 가지만, 두세 명씩 끼리끼리 걸을 때 끼지 못하고 혼자 눈치 보며 따라가게 된다. 사실 회사에서 처음 겪은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를 사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함께 집에서 지냈다.
“저는 완충재를 가득 채운 방에 갇혀 자란 것 같아요. 엄마는 미리미리 모든 걸 준비해 주셨어요. 저는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됐고요. 엄마가 저에게 최선을 다하셨다는 건 알아요. 모든 걸 엄마랑 공유했지만 진짜로 힘든 건 말할 수가 없었어요. 회사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정답이 있을까요?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요.”
그녀는 세상에서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기중심이 없으니 작은 바람이 불어도 크게 휘청거리고 이겨낼 힘이 없었다. 유년기라면 부모가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소연은 그걸 못하고 있었다. 진즉에 엄마의 품을 떠나야 했는데, 엄마의 보낭 안에 싸여 있다가 준비 없이 밖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완충재가 가득한 방에서 천천히 나와서 스스로 걸을 준비를 해야 했는데, 준비 없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소연은 상사가 간단한 질문을 던져도 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사수가 일을 알려줘도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실수가 쌓이다 보니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녀의 경우, 좌절과 실패를 겪게 하지 않으려던 엄마의 보살핌이 오히려 어른으로 성장을 막은 것이다. 과도한 보호는 독이 되기도 한다. 주어진 환경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산다는 것은 영혼을 파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는 건 심리적 의존상태에서 벗어나서 독립하는 것이다. 부모와 한 몸인 융합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입장을 가진 ‘내’가 존재해야 진짜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소연은 화법부터 어른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어떻게 했어요” “엄마가 어떻게 했어요”라는 식의 남들이 어떻게 해서 힘들다고 표현한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는 동료들이 따돌려서 외로웠어요”와 같은 자신의 입장이 없다.
아마도 엄마 몰래 용기 내어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상당히 오랜만에 자신을 드러낸 행동이었을 것이다. “저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변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상담은 3회기를 한 후에 끝났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끝이 났다. 상담을 하다보면 내담자의 상태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 상담자로서 뿌듯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나도 함께 성장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꼭 해피엔딩만 있지는 않다. 소연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심리상담의 목적은 ‘어른 몸속에 갇혀있는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은 어린아이에 머무르게 되면, 어른들이 모여 있는 세상에서 어른 역할을 해내랴고 애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아이에 갇혀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 1인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긴 어렵다.
상담 사례 중에, 입사 후 사람들이 “자신을 챙겨주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었고, 결국 한 달 만에 퇴사하고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갔다는 내담자가 있었다. “도움이 될 만한 약을 타오긴 했는데 엄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무서워서 약봉지에 손도 못되고 있어요.” 그의 마음속에는 나의 크기보다 엄마의 크기가 훨씬 더 크다. 나라는 주어가 작으면 외부의 영향은 더 크게 작용한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말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심리적으로 나와 외부 대상이 합체된 부분이 크면 클수록 나와 타인의 구분이 어렵다. 심리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고, 심리적 경계를 그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의 목소리가 없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존성의 문제로 상담을 온 대부분의 내담자는 스스로 선택한 적이 별로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고 소소할지라도 자신의 욕구와 입장을 중심에 두고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자란다. 특히 외부 상황과의 관계에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이 어떠한지 잘 살펴야 한다.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어떠한지 잘 알아야 한다. 상대의 입장이 아니라 내 입장이 분명해야 한다.
‘아이 같은 어른’이 있다면 ‘어른 같은 아이’도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아이를 ‘애어른’이라고 부른다.
절대적으로 믿었던 영적 스승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정호는 모든 것이 무너져 가는 상태로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무엇이든 알아서 잘했던 그는 나와 몇 번의 상담을 거치면서 자신 안에 어린아이 같은 흑백논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좋은 것이 아니면 싫은 것, 남의 말을 다 듣거나 아니면 아예 안 듣거나 같이 극단적으로 구분하고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함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싶다는 스승을 만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종교적인 헌신을 시작하게 된다.
스승과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고 수제자가 되고 싶었다. 가끔 이상한 느낌이 들때도 있었지만 ‘설마 그럴 리가 없지, 다른 생각하지 말자’라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했다. 흑백 논리에 빠져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적 측면은 애써 외면했다.
정호는 왜 그랬을까? 이유는 상담을 하면서 드러났다. 그는 자라면서 부모에게 징징거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사달라고 떼를 쓰거나 울었던 적도 기억에 없다. 자신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힘들어도 더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다.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나보다 수준이 낮네. 어리네’라며 어른스러운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정호는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그는 긍정적 감정은 북돋웠고 부정적 감정은 없애려고 했다.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의 도움이 필요한 숙제를 해야 해서 직장을 다니던 엄마를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잠들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반가운 마음에 엄마를 찾았는데, 너무 지쳐있는 엄마를 보면서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는 말은 그때 다 삼켜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그날 이후 정호는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씩씩한 애어른으로 행동했다. 알아서 공부하고, 의젓했으며,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도 잘 했다. 매년 반장을 도맡아 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힘든 감정을 숨기게 됐다. ‘나는 어른이니까’하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보듬어 줄 사람이 점점 주변에 사라졌고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다 삼켜버렸다. 그렇게 멋진 페르소나는 만들었지만, 마음은 아이에서 멈춰버렸다.
신앙을 위해 직장을 그만뒀을 때도, 남들 보기엔 믿음에 올인하는 멋진 종교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른이 되어서야 마치 잊어버린 어린아이가 찾아온 것처럼 스승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선택이었다. 그래서 한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뭔가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스승의 태도에 하나둘 떠났어도 자신만은 의심을 차단하고, 믿기로 했다. 결국 성장하지 못한 마음의 눈이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배신당할 때까지 버티게 자초한 것이다.
마음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감정의 영역이다. 마음은 신체가 발달하는 것처럼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다. 불변의 법칙이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의식을 조절하는 힘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욱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을 어른답지 않다고 말한다. 감정이 흥분이나 충동성에 휘둘리지 않을 때 어른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릴 때는 어린아이의 감정이 드러나야 한다. 어릴 때 어른처럼 취급받거나 행동하게 되면 내면의 아이가 성장을 멈춘다. 내면의 아이가 자라지 못하면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서 통제할 수 없는 충동에 휘둘리거나, 아이처럼 순진하거나, 의존적이거나 아니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자아의 성장을 위해서는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인식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빛이 강하게 비칠수록 그림자도 진해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함께 공존한다. 긍정적으로만 살고 싶고, 밝게만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림자를 거부하고 빛만 갖고 싶다는 것이다. 순수하고 맑은 순백의 마음만 갖고자 하는 것은 최소한 우리에게는 판타지다. 절름발이 마음인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면 자아는 성장하지 않는다. 심하게는 정호처럼 어린아이의 흑백논리에 갇혀 버릴 수 있다.
감정이 자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감정은 분화해야 한다.
‘좋다, 싫다, 예쁘다, 행복하다, 무섭다, 두렵다, 화난다, 힘들다’와 같은 단순한 감정으로는 어른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버겁다. 단순한 감정이 여러 가지 복합적 감정으로 분화해야 현실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 좋다, 싫다와 같은 단순한 감정을 인식하고 나면, 좋다는 감정이 행복해서 좋은지, 예뻐서 좋은지 좀 더 다양하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감정의 분화과정이다. 행복해서 좋다와 같은 감정이 조금 더 세분되면서 마음결이 점점 섬세해진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의 색깔과 농도를 인식하면 감정은 풍부해지고, 그만큼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도 힘이 실린다.
삶의 주인으로서 내가 선택하고, 경험하고, 피드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믿는 과정이 반복 순환해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진다는 뜻이다. 무거운 현실의 짐들을 짊어지고 주어진 현실에서 지혜를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가끔은 어린아이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순백의 판타지에서 깨어나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어른의 시선이다.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지전능함, 완벽주의, 이상적인 상태를 포기하는 것 또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누군가 해줄 것이라는 의존성에서도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서 슬퍼하고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털어내야 한다. 그래야 꿈과 현실 사이의 평균대에서 균형을 잡고 앞으로 한발짝 내딛을 수 있다. 통제되지 않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느끼고 이를 언어로 명명하면서 자신 안에 수용해 보자. 그러면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내 감정이 어떤지,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다음 시간에는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심리적으로 단단한 사람들을 통해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