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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소장 Aug 28. 2023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엄마가 힘들어서 그랬어도,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를 표현했더라면...

  

인생의 허무함을 호소하며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내담자들이 있다. 외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도 많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뤘다고 말하는 한 경영인은 상담에 와서 어느 날부터 문득 허무한 마음이 들어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던져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데 가족은 물론 주변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자기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힘듭니다.”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한 마당발의 영업왕은 관계에 갈등이 생기게 되면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지?’라며 제대로 말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환멸이 든다고 했다. 요즘 들어선 그 환멸의 크기가 더 커져서 불면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낮에 들었던 상처받은 말들이 누우면 머릿속을 헤집는다. 하고 싶었던 말들과 말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유들이 뒤범벅되어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다. 왜 나는 이러고 사는 걸까? 아니 나답게 살고 싶다. 그런데 나답게 사는 게 뭐지?   

  

누구나 다 아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보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스스로 미흡한 존재임을 인식하라는 철학적 명제를 담고 있다.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내 정신의 영역을 살피고 돌보라는 의미가 있다. 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서도 주체로서 생각하는 것은 물질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재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객관적인 현실과 꼭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개인에게는 엄연히 실재하는 ‘주관적인 현실’이다. 보통은 오감을 통해 경험된 사실을 바탕으로 주관적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시선의 차이가 심하면 부적응적인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객관적인 외부 세계의 정보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아는 주관적인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동상이몽>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갈등하다가 화해하는 과정이 한편의 심리 상담기를 보는 것 같아 흥미롭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대에게 ‘어떤 좋은 면’을 기대하면서 결혼하거나,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함께 생활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 때문에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된다. 이를 두고 콩깍지가 벗겨지는 과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상이몽> 출연진 중에 트로트 가수인 박군, 한영 부부가 나눴던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영은 “남편이 특전사 출신이라 기대가 있었는데 속은 거 같다”라고 말하고, 박군은 “결혼을 했는데 아내 집으로 재입대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아내는 특전사라는 든든한 남편을 기대했고, 남편은 군대에서 벗어나 아늑한 가정을 기대했던 것이다. 박군, 한영 부부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으로 결혼 전후 부부가 겪게 되는 좌절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제대로 된 부부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박군, 한영 부부처럼 서로간의 적절한 기대치가 꺾여가는 과정, 즉 ‘좌절’이라는 통과의례를 지나야 한다. 상대에 대한 환상이 깨져야 현실을 제대로 살 수 있다.     


물론 좌절의 강도가 너무 크면 관계가 아예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잔잔한 파도처럼 몰려오는 좌절들은 사랑을 그리고 관계를 더 현실적이고 돈독하게 만든다. 기대했던 환상이 깨지는 경험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좌절이 있어야만 현실적인 삶에서의 관계가 성장할 수 있다. 좌절 때문에 상대의 진짜 모습과 대면할 수 있고, 이를 해결할 힘이 생긴다.  대인관계뿐 아니다. 나를 안다는 것도 결국 나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좌절을 겪으며 실제의 자신을 대면할 때 가능하다. 그래야 현실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 정신의 발달 단계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판타지 속에 있다가 좌절을 겪으며 현실로 내려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2~3살 경에 엄마의 립스틱을 바르고 엄마처럼 되고 싶어 한다. 조금 더 자라서는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면서 뽐내기도 하고, 엄마의 뾰족구두를 신고 멋쟁이처럼 방안에서 돌아다닌다. ‘나는 공주’라는 판타지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소파나 침대 위를 날듯이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긴 플라스틱 칼을 휘두르며 악당을 물리치는 엄청난 힘을 가진 히어로처럼 뛰어다닌다. 두 경우 모두 아이들은 진지하다. 아이들의 정신은 공주와 영웅이라는 판타지가 가득한 것이다. 그 와중에 부모가 짓궂게라도 너는 공주가 아니라거나 영웅을 악당(주로 아빠)이 힘으로 제압해 버리면, 아이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판타지의 크기들이 작아지고 현실 속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님이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크기는 조금씩 작아져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거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자라면서 꿈의 크기는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대면하면서 더 작아진다. ‘겁이 많아서’,‘피를 보는 게 무서워서’, ‘공부하기 싫어서’등의 현실적인 한계를 겪으며 꿈은 좀 더 현실적으로 변화한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내가 타협하며 조율하는 것이다.     


태민이는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이 부산하고 산만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의례 그런 것이라 여겼지만, 유치원 수업 시간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또래관계도 불안했다. 상담을 하며 아이의 환경을 하나씩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점을 발견했다. 바로 ‘공주’였다. 아이의 옷장엔 공주의 옷들로 가득 차 있다. 백설공주, 오로라공주, 쟈스민공주, 인어공주, 신데렐라, 엘사와 안나공주 등 캐릭터별로 드레스가 가득하다. 가방부터 신발까지 액세사리는 반드시 핑크색으로 맞춰야만 직성이 풀린다. 집에선 이름 대신 ‘공주’라 불렀다. 집안에서 공주처럼 살던 아이는 스스로를 공주로 여겼다. 같은 또래 아이들은 서서히 공주의 신분을 포기하고 친구들의 세계로 잘 적응해가는 반면에, 태민이는 여전히 공주 옷을 입고 공주 발걸음을 고집하면서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유치원을 다녀오면 아이들이 자기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곧 초등학교 입학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몇 번의 심리치료와 상담을 통해 아이는 현실의 나와 마음속의 나의 간극을 메우게 됐다(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인 나를 돌아보는 법에 대해 소개한다) 다행히 초등학교를 입학한지 한 달 만에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다. 공주 옷을 포기하고 또래들과 비슷한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은 ‘실체로서의 나’를 경험하는 곳이다. 자신이 공주임을 절대 포기하지 않던 아이가 공주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속 판타지는 사라지고 아이는 현실에 발을 디디게 됐다. 마음은 힘들었지만 자신이 공주가 아님을 받아들이면서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학교 질서 안으로 잘 적응하게 된 것이다. 포기하는 것도 선택이다. 판타지를 ‘포기’함으로써 산만하고 불안했던 아이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유년기에는 마음이 덜 자랐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이지?’를 아는데 양육자나 주변인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뭔가를 할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지적이나 훈육을 많이 받은아이들은 자신은 항상 뭔가를 잘 못하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으로 인식한다. 또한 양육자가 강압적이면 아이들이 겉으론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로 자라지만 사실은 자신을 드러내 본 경험을 하지 못한다. 반면, 양육자가 허용적이면 자신의 욕구를 마음 편하게 드러내면서 자아가 팽창되는 경험도 하고, 잘못해서 위축되더라도 비난 없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수용하며 자라게 된다(방임과 무조건적인 수용은 허용은 다르다). 자신이 느끼는 욕구나 감정을 존중받는 것이다.     


자기정체성을 찾는 과정 중인 청소년기에는 또래와의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시기에 왕따나 은따를 겪게 되면 외부 세계가 불안정하고 무섭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걸 어려워한다. 자신이 무얼 느끼고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인지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외부의 부정적인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자신을 숨기는데 익숙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성인이 되면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해 본 주관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즉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입장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개성이 사라진 것이다.  

   

“저는 원래 멘탈이 약해요. 그렇게 태어났어요.” 마치 숙명처럼 비관적 운명을 지닌 사람처럼 말하는 경우들이 간혹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말하는 멘탈이라는 자아개념은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태어나서는 첫 2~3년 동안은 자아는 없거나 약한 것이 당연하다. 성장하면서 서서히 자아가 만들어지고 강화되면서 자신의 색깔이 등장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주양육자에게 생명 전체가 의존된다. 의존상태에서는 반드시 돌봄이 필요하다. 신체적인 돌봄이 있어도 심리적인 돌봄이 없으면 아이들이 마음을 기댈 곳이 없으면 엄청나게 불안해한다. 자아가 약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중심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불안해하더라도 주양육자가 괜찮아, 걱정마와 같은 말과 스킨쉽으로 아이의 마음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아이의 불안은 디폴트적 감정이다.   

  

그러나 아이가 의존해야할 대상이 너무 무섭고 처벌적이라면 아이는 자신의 불안 속에 꼼짝못 한 채로 갇히게 된다. 불안은 표현하지 못한 채로 주는 대로 먹고, 입혀 주는 대로 입고, 하라는 대로 하는 수동적 상태가 된다. 징징거리며 울거나, 안 하겠다, 싫다는 거부의 입장을 냈다가는 언어폭력을 시달리거나 심하면 매를 잔뜩 얻어맞게 된다. 이런 양육 환경은 겉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만 마음이 자랄 환경은 아니다. 마음은 표현해야 자란다. 안전한 양육환경이 아니었기에 심리적인 불안은 낮아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의 입장을 드러내고 표현하기 보다는 남들의 눈치를 보고 남들이 불편할까 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된다. 타인의 관점에서 살아가게 된다.     


즐겨보는 가족 유튜브 채널이 있다. 가수 장윤정의 딸인 하영이의 발달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채널이다. 하영이는 “내가 할게, 나 화났어, 나 삐졌어”라는 말을 가감 없이 한다. 하여이는 자신의 욕구를 드러낼 때 외부 반응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눈치를 보지 않고 좋든 싫든 자기 마음을 자유롭게 드러낸다. 평가에 대한 불안이 적기 때문에 자기의 욕구에 충실할 수 있다. 어리지만 참 단단해 보인다. 자아의 크기가 클수록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니 단단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하영이의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엄마와 아빠, 오빠가 있다. 든든한 빽그라운드를 지녔으니 눈치 볼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게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 아이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불확실한 세계에 도전해 볼 용기와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할게. 내가”라며 자신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게 되는 것이다. 바로남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욕구와 느낌을 알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자기 욕구를 인정해 달라고 외치면 될까. 아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목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심리적 경계’가 있는가? 이다. 타인의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고 동화된다면 그건 타인의 자극이 깊게 들어와서 나를 밀쳐내고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즉 외부 자극에 대해 “그것은 어떻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취약하다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가 있어야 내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남과 구분되는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래야 외부 자극이 들어와도 자신의 입장에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다움이다. 내가 중심이 서야 타인의 입장이 보인다. 나와 남이 분별이 되어야 ‘상대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가능하다.     


생후 6개월경 아이들의 낯가림도 익숙한 사람과 낯선 사람이 다르다는 구분을 하는 과정이다. 이것과 저것을 구별할 줄 아는 원초적인 자아감의 시작이다. 유아기의 의존상태에서 성인의 심리적 독립을 이루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의 말투를 예로 들어 보자. 아이들은 주어를 주로 어떻게 쓸까? ‘엄마가 ~~ 말했어’, ‘친구가 장난감으로 때렸어’,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어’ 등과 같이 타인 중심이 되어 말한다. ‘내가 어땠어’라고 말하는 경우는 가끔 등장한다. 나란 주체가 덜 형성되었기에 주체의 관점이 적은 게 당연하다.   

  

청소년기까지도 온전한 자신의 입장과 태도를 선명하게 갖기는 어렵다. 유혹에 흔들림도 많고, 실수도 잦고, 휘청휘청하며 흔들리며 성장하는 자아정체감 형성 시기이다. 주변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외부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청소년기에 또래들과의 유대감이 중요하다. 친한 무리였던 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거나 배신당하는 경험은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다.  

  

나는 남매를 키웠는데 둘을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참 다르다. 다른 만큼 자라면서 참 많이 싸웠다. 오죽하면 “너네는 지나가면서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둘의 사춘기가 겹칠 즈음엔 정말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그렇게 싸우면서 잘못은 매번 상대방을 탓했다. 정말 작은애는 꺼이꺼이 울면서 억울해한다. 둘을 함께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아무리 설명해도 누나 탓이 저절로 되는 억울함은 절대로 벗어나질 못했다. 누나도 상대방 탓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둘의 사춘기는 지나갔다.     


사춘기까지는 자기중심적인 상태라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기엔 자신이 상대방에게 한 행동은 보이지 않고, 상대한테 당한 것만 이야기한다. 심리상담을 하는 엄마지만 내자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일지라도 억울한 마음이 잦아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음 그랬어. 어떻하냐”(아마도 영혼없이 했던 것같다)라며 들어준다. 사춘기 아이들은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각자 따로따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나면 아이들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에게 억울함이 충분히 수용되어야 마음이 가라앉으며 타인이 보이는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억울함’이 많다면 ‘내가 혹시 마음이 어린 것을 아닐까?’를 자문해 보면 좋겠다.   

  

그렇다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용적인 것은 좋을까? 착하고 순종적으로 자랐다는 말은 남들에게 좋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개인의 성장에는 큰 손해다. 내담자 중 한 명은 주변에서 착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어느 순간 보니 자신을 “착하다”고 부르는 말이 “바보 같다”와 같은 의미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에게 착하다는 의미는 타인의 욕구에 맞춰서 살았다는 의미였다. 타인과 내가 구분되지 못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상담을 하면서 내담자들이 힘들다고 호소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본인의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사실은 ‘나’라는 주어가 잘 나오지 않는 경우들이 꽤 있다.     


다음의 두 가지를 비교해 보자.

1. “남들이 저한테 ~~해서 괴로워요”

2. “남들이 저한테 ~~하는데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괴로워요”     


1은 본인의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했다는 말이 중심이다.

2는 본인이 겪은 괴로움의 내용(무시당하는 마음)을 정확하게 호소한다.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바로 남과 구분되는 나의 입장과 감정이 담긴 문장이다. ‘저것과 이것’을 구별해 경계를 세우는 것이 자아 발달에 중요하다.     


성인이 되어도 외부 자극에 지나치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자아가 약하다는 뜻이다. 심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상담에 온 경우에 “지하철을 타면 모든 사람이 저를 쳐다보는것 같아서 정신이 다 빠져나갈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이와 같은 경우도 자아가 취약해서 외부 자극에 압도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상담에서 자주 하는 질문이 있다.

“그때 당신은 어떤 말을 듣고 싶었나요?”

그 말 한마디에 내담자들은 눈물을 보이곤 한다. “위로받고 싶었어요. 조언이나 충고 말고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어요”라고 말한다. 객관적인 평가나 조언보다는 좌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위로받고 공감받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린 내담자는 “사업이 망해서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래서 날 때렸을 것이다”고 오히려 부모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본인이 맞아서 슬프고 억울했던 감정을 제대로 풀지 못해서 어른이 되어 마음의 병을 겪게 되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가 힘들어서 그랬어도, 그것 때문에 나는 기댈 곳이 없었다’와 같은 언어적 표현을 함으로써 자존감이 싹이 트기 시작한다.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심리적 독립을 향해가는 길이며 심리적 경계가 만들어지는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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