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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소장 Sep 11. 2023

no를 해야 자아가 만들어진다.

no를 하는 것은 인간 DNA에 내재된 본능인 듯...

 

세희(가명)는 이별 통보를 받고 몇 달이 힘들었다.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상담실의 문을 두드렸다. 헤어진 연인의 첫인상은 사실 비호감이었다. 하지만 ‘정말 좋아한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구애에 마음이 움직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다가오는 그의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매일매일 쏟아지는 관심은 싫지 않았고 어느새 세희도 그런 남자친구에게 빠져들었다. 그러길 한 달, 갑작스레 이별 통보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매달려도 보고, 화도 내봤죠. 냉정히 따져보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는 사람을 앞으로 어떻게 믿겠어요. 빨리 헤어진 게 오히려 다행인 거죠.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제가 견딜 수가 없어요. 제 자신이 너무 처참해요.”    

지금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런 나를 “감히(!) 차다니”. 불같은 분노와 차가운 외로움, 막막한 공허감이 너무 힘들다. 아니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 자신이 이해가 안 된다. 고작 한 달이란 만남으로 내 마음이 이렇게 흔들려버리다니!     


다행히 세희는 몇 차례 상담을 진행하면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가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그와의 이별 때문이 아니었다. 이별 통보로 인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자극된 탓이 컸다. 밑마음으로 들어가서 본 진짜 이유는 ‘거절당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담자들은 상담실에 오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 힘든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면, 외면하고 좌절된 마음이 스스로 수용되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마음을 자신의 힘으로 수용하거나, 타인에게 진심으로 공감을 받게 되면 복잡한 마음들은 정리가 된다. 상담자는 내담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틀 속에 갇혀있는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면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 자아가 튼튼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심리상담자 말고도 믿을만한 대상에게 털어놓고 감정을 수용받는 경험도 자아가 튼튼해지는 과정이다. 힘든 마음을 이해받고 공감 받는 과정이 바로 자아가 튼튼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호하고 혼란스런 감정들을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다는 것으로 확인받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감정이 ‘맞다’라는 확인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거부하고 싶었던 모호한 감정들이 명백하게 인정되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발생했던 사건 자체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마음속에 엉켜있던 에너지가 풀려나면서 가볍고 자유로워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유아기부터 청소년기 시기까지의 일들이 많이 기억나는가? 아마도 몇 개의 사진처럼 느껴지는 장면들로만 자기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나에게도 몇 개의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5~6살 경 마루에 앉아서 봤던 마당 한가운데 햇빛과 바람에 빨래가 살랑거리던 모습, 부엌에서 분주하게 저녁준비 하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내 모습들이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마치 사진처럼 기억된다. 이렇게 드문드문 기억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시절의 기억이 이야기가 아닌 몇 개의 장면으로만 남아 있는 것일까? 이유는 어린시절에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하는 주체’가 아직 똑바로 서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스토리에 대한 기억보다는 주체가 드러났던 몇 개의 장면만으로 나를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 시기가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주체감이 약하기에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따라 자아가 영향을 많이 받는다.     


초등학교 4~5학년 이전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힘들었어도 친구로부터 왕따를 당했다는 배신감과 거절감이 크지 않다. 그런데 자아 정체감이 형성되는 초등학교 5~6학년 이후부터는 왕따 문제를 호소하는 경우들이 많다. 왕따를 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각각의 주체가 조금 선명하게 생겼을 때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그때는 친구들과 관계가 좋으면 행복감을 더 많이 느끼고, 친구와 관계가 조금 틀어지면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혀 마음이 힘들어진다. 친구의 작은 변심에도 상처를 받고, 작은 외면의 시간도 너무 긴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는 부모와의 관계보다 또래관계가 자아형성에 더 많은 영향을 마치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시기에는 ‘주체’가 더 생겼기 때문에 어릴 때 비해 더 많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자아의 형성에는 어느시기나 다 중요하지만 인간은 특히 중요한 두 번의 시기를 거친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심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다. 첫 번째 시기는 미운 3~4살이라 불리는 시기다. 두 번째는 반항하는 청소년기이다. 두 시기엔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이때는 명백한 ‘No’가 등장하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 DNA에 내재된 본능인 것 같다. 그동안 잘 순응하던 것에서 “싫어” “안 해” “왜?”와 같은 자기입장을 드러내며 기존의 질서를 거부한다. 부모에 맞서고, 선생님께 맞서면서 자기 또는 또래(집단)의 입장과 태도를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잘 펼치는데는 전제조건이 있다. 아이들이 외부환경을 안전하게 느껴야 가능하다. 강압적이거나 무서운 부모거나, 먹고사는 문제로 매일 싸우는 불안한 환경에서는 아이들은 본능의 소리인 ‘No’를 하지 못한다. 사춘기 때도 마찬가지다. 주변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받을 위험이 있으면 아이들은 ‘No’를 말할 수 없다.   

  

자아의 성장과정은 엄마아빠의 손길을 거부하며 자기 표현을 통해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입장을 내놓으면서 타인과의 차이를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타인과 사물, 사건과의 심리적 경계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청소년기에는 믿을만한 또래들과 함께 기존의 가치관이나 개념에 대해서 ‘No’를 외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내놓는다. 기성세대의 권위나 사회질서에 대해 선을 긋고 경계를 세운다. 3~4살 때는 안전한 부모를 믿고 ’No’를 하며 자신을 드러내며 자아가 성장하고, 청소년기는 또래와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기존 질서에 대해 ’No’를 외치며 마음의 폭과 깊이를 성장시킨다. 전제는 믿을만한 부모가 있어야하고, 믿을만한 친구가 있어야 ‘반항’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마음의 심지를 만들어 간다.    

 

발달과학자 데보라 맥나마라는 ‘유아에게는 반의지(Counterwill) 본능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반의지는 자신이 통제받거나 남에게 무언가를 강요당한다고 느낄 때 발동되는 본능적인 태도다. 아이들은 만 2세가 되면 본인의 욕구에 반하는 주변의 욕구와 소망을 저항하며 대응할 수 있다. 이는 반의지 본능에 따르는 것이지만 아이의 저항은 부모를 화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럴 때 부모가 심하게 화를 내거나 위협을 하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반의지적 본능을 표현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섭다고 느끼며 자신의 성장욕구를 접는다. 그와 비슷한 경우들이 ‘어릴 때 순둥이였어요.’ ‘부모님이 시키는대로 자랐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싫어’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어른들에게는 성가실지 몰라도 이는 자아성장을 위한 기념비적인 본능적인 태도다.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을 무사히 뗐다는 뜻도 된다.     


반드시 반항이 있어야 내 입장이 만들어지고 그래야 자율성이 자란다. 아이들이 ‘No’를 한다는 것은 “그것 싫고, 이것 입을 거야”, “그것 안 먹어, 이거 먹을래”라고 말한다. 이는 ‘남의 그것’과 ‘나의 이것’을 구분할 힘이 생긴 것이다. 이처럼 ‘그것을 No할 수 있는 힘’은 ‘나다움’을 일궈가는 시작이다. 즉 내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안전하게 허용되는 환경에서 자라야 ‘No’를 표현하고 자율성이 자란다.    

 

하지만 오해는 말자. ‘No’를 허용해야한다는 말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의 ‘No’에는 수용도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로서의 좌절도 따라온다. 아무리 떼를 쓰더라도 부모의 입장에서 안 되는 것이라면 아이는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럴 때 부모는 아이를 안아주며 ‘그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포기해야 해’라고 좌절된 마음을 보듬어주면 된다. 그러면 아이는 좌절로 인해 위축된 마음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별일 아닌 듯이 좌절도 소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런데 부모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계속 울면 맞을 줄 알아’라고 위협하는 것은 좌절된 아이의 감정을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런 피드백을 받으면 아이는 좌절돼서 속상해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된 것이고, ‘No’를 한다는 것은 나쁜 것이므로 참아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자아성장을 위한 본능을 억압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부모에게 순응하고 의존하는 사람들(마마보이 또는 마마걸 같은)과 이야기하다보면 왠지 그들이 나이보다 어리게 느껴진다. 그들과 상호작용에서 스스로의 중심주체의 소리가 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아는 작고 소소한 일들이라도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중심 주체가 등장해야 형성된다. 그렇게 인간은 의존상태로부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독립체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주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나는 한가할 때 가끔씩 법륜스님 강의를 본다. 법률 스님의 유튜브 채널 ‘즉문즉설’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과의 문답형식으로 진행되고,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스님은 부모들에게 자녀가 만 20살이 넘으면 그들의 인생에 참견하지 말라 한다. 옆으로 빗겨 서서 그들이 힘들어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하물며 동물들도 어린새끼는 잘 보살피다가, 스스로 먹이사냥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잔인하다고 할 만큼 둥지 밖으로 쫓아버린다. 독립을 향한 본능적인 힘을 믿고 내보내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수용과 좌절의 반복경험을 통해 어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No’라는 부정성(否定性)은 나와 외부세계가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나와 주변이 다름을 알고 구분하는 심리적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심리적 경계가 필요한 이유는 외부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 제일 중요한 시작점이  ‘거절하기’다. 이는 외부로부터 나를 지켜내기 위한 본능적 태도다. 만약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다면 나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비중이 높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나 부모가 요구하는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반항과 거부는 주변 영역과 자신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내야할 내면의 목소리이며 중요한 본능적 행위다.     


어떤 내담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아 대중교통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가 더 많이 느껴지면 지하철에서 극심한 불안감에 휘몰아쳐서 공황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인파가 많은 번화가를 걸어가면 외부에 기가 다 빼앗기는 것 같아 밖에 나가기 어렵다는 이들도 있다. 둘 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 만큼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런 호소는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아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게 성장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표현해본 적이 없거나,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를 받은 경험이 적었던 경우들이 많다. 그들은 타인에게 ‘No’를 해본 경험이 적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거절하는 게 가장 어려워요’라고 호소한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영아 어린이집에는 한 명의 영아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같이 울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자아단계는 나와 타인의 구분이 잘 안되는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아의 힘이 약하면 당연히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중심 주체가 약하면 이처럼 목적지까지 가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 외부와 자신과의 주체가 구분되지 않으면 심리적 경계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중심주체가 세워져야 심리적 경계가 만들어지고 외부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호소하는 문제들 중에서 ‘회사나 친구들에게 어디까지 말하는게 적절한 건지? 어디부터는 말하지 않아야 할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경우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심리적 경계의 선이 어디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인관계가 너무 어렵다. ‘적당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No’를 해봐야 알 수 있는 감각이다. 연인을 사귀면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게 되는 경우도 과도한 의존상태로 넘어가는 것이고 심리적 거리조절이 어렵다는 것이다. 사랑해서 관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홀로 설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못 견디는 것이다. 연인의 시공간에  자신이 함께 들어 가 있으려는 것이다.      


어떤 내담자는 엄마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 시간을 선택해서 상담실에 오고 있다.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해결하고 싶지만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한다. 그가 혼자 있을 만한 여유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의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그와 그의 엄마는 “점심은 챙겨먹었니?” “저녁에 누구 만나니?”등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마음안에 각자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둘의 교집합의 크기가 너무 많은 융합된 상태였다. 나의 것과 엄마의 것이 구분되지 않는 경계가 없다. 정신적으로 공유하는 교집합이 크면 클수록 개인의 마음이 자랄 공간은 없다.     


자아가 약한 사람들은 심리적 경계(너와 나의 다름의 거리)가 약하다 보니 공감해야할 순간에 상대방의 마음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린다. 내 일처럼 똑같이 가슴 아파하다가 자신이 너무 힘들어져서 결국 친구를 멀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타인의 감정에 너무 몰입하면 친구의 고통을 고스란히 겪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외면하거나 도망가게 된다. 이런 경우도 외부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 것이다. 힘든 친구를 공감하고 도우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자아 상태라 할 수 있다. 마음에서 적절한 거리가 있어야 대상이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인식된다. 너무 밀착되어있으면 부분만 보여서 왜곡할 수가 있다.     


병서(가명)는 거짓말 한번 한적 없는 모범생으로 살아 왔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평가는 딱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항상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서 힘들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상담 시간에 과거를 복기하다보니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새카맣게 잊었던 일인데 기억이 떠올라서 병서도 신기해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 집에서 놀다가 친구 엄마의 순금 반지를 훔쳤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더 이상의 심한 추궁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훔치지도 않았는데 그런 오해를 받으니 너무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숙제를 하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는데 한쪽 구석에 금반지가 있는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라 정신이 아찔하게 혼미해졌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구석으로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자기도 모르게 훔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고 그런 자신이 너무 무서웠다고 말한다. 집안일에 치여 피곤해하는 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었고, 친구에게 갖다 줄 수도 없었다. 금반지를 어디 숨길 수도 없어서 안절부절하며 손에 들었다가 입에 물었다가를 반복했다고 한다.    

 

“혹시 이빨로 반지를 물어보셨나요?” 내가 물었다.

“물었더니 딱딱해서 더 놀랐던 것 같아요”

“순금은 강도가 약해서 딱딱하지 않아요. 친구 엄마 반지가 순금이라면 병서 씨 서랍에 있던

반지는 아닐 거에요. 쇠로 만든 장난감 반지 일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병서는 깊은 숨을 쉬며 먼 곳을 응시하듯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서랍 속 반지를 보며 “아니야. 난 훔친 적 없어”라는 말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의 뿌리가 되었다.     


자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no’로부터 시작된다. 자아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no’를 하는 훈련을 통해서 자아가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나의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no’를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 작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용기를 갖는 연습을 시작하자. 큰일은 너무 위험부담이 커서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니 무리수를 두지 말자. 처음 시작은 작은 것부터 별것 아닌 일이지만 그래도 소소한 자기 의견을 내놓은 것부터 시작하자. 작은 경험을 통해 ‘표현해야 수용되고, 수용되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몸과 감정으로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스스로의 입장을 표현할 용기를 갖게 된다.   

  

두 번째, 내가 ‘no’를 못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거절을 받아들이는게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과잉팽창의 뿜뿜한 상태와 좌절로 인한 위축상태를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음이 성장한다. ‘no’와 함께 좌절감정을 겪는 것이 결국은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는 마음으로 소소한 일들에서 작은 용기를 내면 좋을 것 같다.   

  

자신에게 익숙한 마음의 패턴대로 살면 지금까지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결국엔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나비효과’처럼 마음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여러분들도 자신에게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작은 용기를 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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