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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소장 Sep 04. 2023

사소한게 나입니다.

인간은 ‘팽창된 나’와 ‘좌절된 나’를 반복경험하며 성장한다

    

전 세계 인구는 80억 명, 우리나라 인구는 5,000만 명이 넘는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나와 똑같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정과 태도를 갖고 있다. 이는 일란성 쌍둥이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영역은 후천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의 감정과 태도는 태어나면서 완성된 어떤 것이 툭 떨어져서 내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타고난 기질에 후천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어릴 때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신과 감정은 달라질 수 있다.     

  

내담자들 중에는 변화하고 싶어서 상담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아요. 도저히 바뀔 수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너무 우울해서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있다. ‘나는 절대 바뀔 수 없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상담을 통해서 조금만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되면 “변화하고 싶어요, 잘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성장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융 심리학에선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고 말한다. 처음엔 육체로 태어나고, 다른 한번은 정신으로 탄생한다. 육체의 내가 있고, 육체 안에 정신의 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의 나’라는 것이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주체이다. 육체는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뼈의 성장과 함께 대근육에서 소근육으로 분화발전하며 자란다. ‘나’라는 정신도 분화발전하며 자란다. ‘태어나니 내가 있었다’가 아니다. 자존심 낮고 용기 없는 현재의 나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 따라 건강한 발달경로를 못 밟아온 것이다. 기질에 따라서도 다르다. 같은 부모 밑에서 성장한 일란성 쌍둥이가 겉모습이 거의 똑같다하더라도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 입장은 각기 다르다. 다른 사람인 것이다. 자신에게 환경이 어떻게 주어졌고, 그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정신’은 달라질 수 있다.      


영아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난다. 다른 어린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영아들은 주변의 도움을 유도하는 보호 본능 기제를 갖고 있다. 보들보들하고 동글동글한 한 느낌으로 주변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신체적, 심리적 독립까지는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랜 시간의 돌봄이 필요하다. 스스로 밥 먹고, 옷 입고 학교를 가기까지 최소한 6~7년의 보살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이후로도 자아정체감이 형성되는 사춘기시기까지 합하면 12~15년의 긴 돌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의존된 상태인 만큼 자아의 발달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 정서적인 돌봄의 질에 따라 마음은 달라질 수 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영아들은 전체틀에서 보면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주체적인 반응적 표현을 한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달라고 울고, 다 먹어서 배가 부르면 입을 꼭 다물고 뱉어낸다. 이외에도 한두 마디의 단어나 표정, 동작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미운 세 살이 되면 아이들은 대부분의 영역에서 “내가 할게, 내가 할 수 있어”를 외치며 자율적인 인간임을 주장한다. 이는 심리적 독립을 위한 자기 마음을 차곡차곡 만들어가는 행동들이다. 외출하려고 옷을 고를 때도 부모가 준대로 입지 않고 스스로 옷장에서 입을 옷을 찾아낸다. 밥을 먹을 때도 스스로 숟가락을 잡어 들고 주변에 다 밥을 흘리면서도 아주 자랑스럽고 대견해 한다. 유치원을 갈 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서기도 한다. 어설픈 아이의 행동이 허락되고 움직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리지만 바쁜 엄마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사소해 보이는 그 일이 아이에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선택과 행동을 경험하는 자신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엄마, 아빠는 아이의 자발적인 고민과 선택에 대해 “멋지네, 대단하네”와 같은 아름다운 찬사를 보낸다. 이런 피드백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너가 먹어서 다 흘리니까 그건 실패하는 것이다’가 초점이 아니다. 결과가 성공인지? 실패인지?에 비중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볼 수 있는 용기를 응원한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러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두려움 없이 선택하는 행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정 자체에 대한 부모의 긍정적이고 허용적인 피드백 덕분에 아이들은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런 하나하나의 과정이 자아의 힘을 만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아이의 성장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부모의 입장은 때론 아이에 대해서 소위 ‘콩깍지’를 쓰게 한다. 이런 걸 모성애, 부성애라고 한다. 내 아이가 천재처럼 느껴지고 최고로 예쁘고 멋지게 보일 때가 있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첫째가 2살 즈음에 ‘예쁜 아이 콘테스트’에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너무 예뻐서 100% 선정될 거라 믿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친정엄마와 언니들에게 낙방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예쁜 아이로 보였나보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이렇게 예쁜 아기를 놓친 건 완전히 주최 측이 손해”라며 말도 안 된다며 투덜거렸다. 내 아이가 최고라는 팽창된 부모의 판타지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의 전폭적인 힘을 받으며 자아가 자란다.      


아이와 엄마가 한 몸이기에 엄마의 팽창은 곧 아이의 팽창이 된다. 그러면 아이들도 자신이 대단하고 최고라는 판타지를 갖게 된다. 빵빵하게 힘이 들어간 팽창된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팽창된 자아 덕분에 5살의 딸아이가 아빠에게 “술 먹지 말고 일찍 들어와라”라는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친척들, 유치원 등에서 멋지고 잘난 ‘팽창된 나’를 경험하며 자라난다. 팽창된 나는 세상에 발을 딛고 나설 용기를 갖게 한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자아의 성장과정은 팽창된 자아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하고 잘 못하는 현실의 나, ‘좌절된 나’를 경험해야만 한다. 그래야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자아가 생기는 것이다. 몸이 약한 6살 정후는 최근에 태권도 학원을 다니면서 엄청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가장 힘이 쎄고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되어 어느 날 아빠에게 팔씨름을 하자며 도전장을 내민다. 온몸 가득히 뿜뿜한 마음이 가득차서 날아갈듯한 기세로 기를 쓰며 씨름에 덤볐는데, 아빠가 용쓰는 기색 하나 없이 아주 쉽게 팍!하며 단번에 이겨버린다. 정후는 너무 놀라서 대성통곡을 하며 억울한 마음과 함께 ‘이럴 수가 없는데’라는 표정과 함께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본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눈치 없는 남편을 째려보면서 뭐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이가 현실에서 경험해야할 좌절을 맛본 것이다. 자아의 성장에 좌절은 부정적 영향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의 발달에서 날아갈듯한 기세의 자아팽창은 불안정성과 같이 있다. 현실 속에 자신의 한계를 경험해야 심리적 안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이처럼 ‘팽창된 나’와 ‘좌절된 나’를 반복하며 성장한다. ‘좌절된 나’의 경험이 꼭 나쁜 것이 아니다. 지지적인 환경 속에 있다면 좌절해서 마음이 작아지더라도 대단한 좌절이 아닌 한계를 받아들이는 안전감을 경험하게 된다. 좌절스럽지만 너무 쪼그라 들지 않는 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잉 팽창된 나를 경험하고, 좌절된 나를 경험하는 것은 사건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감정은 경험하는 주체가 느끼는 주관적 느낌이다. 그러니 감정은 살아있는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이다. 보편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사랑이나 미움, 원망과 질투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모두 다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느껴진 감정 자체가 잘못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억압하려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음속에 보유하면 불편하기 때문에 없애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느끼는 것조차 부정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감정은 표현하는 것에 허용적인 반면,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제한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억압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심리적 문제는 긍정적 감정보다는 부정적 감정을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처리할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위험해’라며 좋은 점들을 찾아 긍정적 감정으로 대치하려 한다. 가령 믿고 기다려주지 않고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상사를 보면 화가 나면서도 ‘내가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사소하게 예민하게 굴지 말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지!’라며 현실에서 경험된 감정을 긍정으로 왜곡한다. 믿어주지 않는 상사에 대해 실망한 감정을 느껴도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속상해도 속상하지 않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자꾸 왜곡해서 살면 결국은 마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 속으론 상처받고 힘들어도 소심해보이거나 찌질해 보일까봐 그렇지 않은 척, 쿨한 척(cool病)을 하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사람이 소심하고 사사로운 것이 당연한거 아닌가? 왜 잘못처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트라우마적인 큰 사건은 예외로 놓고, 우리가 살면서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대부분 기억들을 되돌아보자. 사실은 그때 당시에 ‘말하지 못했던 사소한 감정들’이 속에 남아있는 경우들이 많다. 마음이란 객관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주관적인 나의 입장’과 관련되어있다. 가령, 하루의 일을 다 마치고 편안하게 침대에 누웠다. 아무 맥락도 없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어떤 장면들이 떠오른다. 찝찝하게 느껴졌던 작은 일부터 이것저것 큰 사이즈까지 자신이 묻어두었던 마음들이 수면위로 올라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툭 튀어 올라오는 것들이 있을 때가 있다. 그중에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사소하고 쪼잔한 것들이라 이불 킥을 하기도 하고,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굴욕적인 기억도 있다. 마음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스스로 소화되지 못한 억압된 마음 조각들이다.      


상담실 찾아온 이들은 마음속에 쳇바퀴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소리들이 참 많다. 제때에 말하지 못한 이유를 물어보면, ‘너무 주관적이라 할까봐, 사소한 일에 집착한다고 할까봐,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할까봐, 너무 부정적인 사람으로 볼까봐, 애처럼 군다고 할까봐,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서’처럼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문제라고 여긴다. 그럼 객관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 말을 들으면 상담자인 나는 이렇게 답한다.      


“원래 인간은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에 감정이 상해요.”     


대범한 사이즈의 사건이나 조직의 일들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엄청나게 큰 몇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고 사소한 조각들이 모여 인생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의 입장과 태도가 드러나면서 일관된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마음이 형성된다.      


성식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됐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상담실을 찾아왔다. 겉으로 봐선 아무 문제없는 반듯하게 자란 청년이었다. 그의 성장 과정을 들어보자. 어릴 때부터 성식은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이 알맞은 선택지를 제공해줘서 크게 불만 없이 자랐다. 집에서도 말수가 적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로 듣는 위치였다. 자신의 입장을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동생과 다투거나 친구와 갈등이 생겨서 울고 있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물어보고 해결해주는 엄마가 있었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힘들면 울다가 잠이 들면 다음날엔 다 잊어버렸다. 그와 상담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눈에 뛰었던 점이 있다.

성식은 힘들다는 이야기는 매번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고하면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보면 그냥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만 반복한다. 상담자가 스무고개 식으로 하나하나 질문을 해줘야만 아주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꺼내놓았다. 스스로도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느낌이 너무 적었다. 주어진 대로 따라하고, 주어진 대로 수행하는 수동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고민조차도 수동적으로 했다. 자신이 겪는 문제도 자기입장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자아의 입장이 점점 약화되어 스트레스가 오면 견디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성식은 상담을 하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어색하고 목구멍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힘들다고는 말하지만 왜? 어떻게? 힘든지를 구체적으로 꺼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것도 몇 회기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마음이란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작은 감정의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공부를 잘해서’ ‘착해서’ ‘말을 잘 들어서’와 같은 상대가 좋아하는 조건이 붙을 때에만 받는 관심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 조건에 해당될 때만 자존감이 높아진다. 공부를 못하고, 말썽을 피우는, 불만이 많은 자신은 무가치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자신 없고 숨기고 싶은 것이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때 못하겠다고 말할 껄’ ‘거절하고 싶었는데’ 등 별것 아닌 일들이지만 마음에 걸려있는 것들이 움직인다. 남들에겐 별거 아니지만 나에겐 중요했던 순간들이다. 이때 억지로 억누르려 하지 말자. 지금 되돌아보면 그냥 말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겁이 났던 것 같다. 거절하면 외면 당할까봐, 또는 관계가 완전히 멀어질까봐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서 좌절에 대한 내성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사소하고 별것 아닌 찜찜한 것들이 앙금처럼 남아 미해결된 상태로 내 에너지를 묶어두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말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내가 작아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이고 복원해야할 자아의 일부이다.      


자아를 복원하는 길은 자신의 내면 감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느꼈던 감정이 곧 나이다.


자아를 복원하는 두 가지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자아의 주관적 감정이 느껴지는 출발지점을 찾아야 한다. 자아를 잃어가는 과정이 부정적 감정을 외면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복원과정 역시 부정적 감정이 느껴지는 곳이다. 특히 대인관계에서 작은 불편감이 느껴지면 왜곡하지 말고 어떤 감정인지 직시해야 한다. 부정적 감정 표현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 번째는 자아의 성장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신의 선택하는 경험이 두렵지 않아야 한다. 소소한 일들에서 남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경험들을 통해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선택해야 좌절이 생기듯이, 작은 좌절들도 별것 아닌 걸로 여겨지는 내성도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입장을 가져야 건강한 자아가 형성된다.          


소소한 감정들에서 작은 노력들이 쌓여 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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