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언어 학대
네가 잘 하니까 네가 하면 되겠네
네가 잘 하니까 이번에 네가 좀 해라
자기가 잘 하니까 내가 신경 안 썼지
네가 잘 만드니까 네가 해
칭찬을 빙자한 학대 행위
타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언어적 학대 행위
아닙니다. 회사 이야기가 아니에요. 회사에서도 발생하지만 회사는 엄연히 자본의 관계로 엮여 있기에 업무량의 밸런스가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학대 행위로 볼 순 없습니다. 비 상업적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말을 적은 것입니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남자들이 핑계로 많이 사용하지요? "자기가 잘 하니까 내가 신경 안 썼지" 언제 많이 나올까요? 아마 결혼 준비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추측입니다)
남자로서 저런 말 안 해본 건 아닙니다만 요즘 들어 반성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말은 타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학대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왜 저런 말을 할까요? 벌어지는 상황에 끼어들고 싶고 도와줘야 하는 건 알지만 멀뚱멀뚱 거리다 얼떨결에 지나갔는데 변명은 해야겠다거나, 귀찮아서 미루거나, 아니면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진짜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문제 있는 거니, 괜히 사람 만나서 힘들게 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뭐, 그런 정도가 있겠습니다.
어찌 됐건 문제는, 자신이 분담해야 할 일을 상대방에게 모두 떠넘긴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말을 전달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네가 잘 하니까 네가 하면 되겠네"라는 말을 악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연인 관계에선 얼떨결에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ㅋㅋ), 모임, 동호회, 친구관계에서는 악용하는 사람이 많죠. 칭찬을 빙자해 상대방을 구속하는 놈들 말입니다.
언급자의 뉘앙스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 어떤 집단에서, 비영리적인 다소 친분이 있고 주기적인 모임을 갖는 동호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동호회는 보통 집행부가 있지요? 이런 집단에서 보직은 순수히 봉사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가 잘 하니까 이번에는 네가 좀 맡아라"라는 경우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물론 뉘앙스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아니면 제가 너무 삐뚜로 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비영리적 집단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회사처럼 몇 명의 임원에 의해 사안이 결정되고, 결정에 대한 책임을 임원 혹은 사장이 짊어져야 하는 일자적 구조의 집단과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범위를 좀 줄여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모임에 보직을 맡아 하던 중 사정에 의해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됐음에도, "네가 잘 하니까 네가 좀 더 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을 잘 헤집어 보면, '지금까지 내가 같이 해야 할 분담된 일들을 네가 잘 알아서 처리해 줬으니까 앞으로도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라는 표현이 됩니다. 제가 너무 꼬아서 보는 걸까요?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든 분명 말을 듣는 입장에선 신체가 구속당하는 학대 행위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친구, 집단, 모임 같은 집단에서, 집단이 고려해야 할 고민, 집단이 해야 할 작은 일들은 결코 한 사람에게 맡겨질 수 없습니다. 나누어야 하고 분배되어야 합니다. 혹은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보상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것 만은 아닙니다. 집단으로부터 그만큼의 깨달음을 얻었다던가, 도움을 받았다던가, 정신적 보탬이 되는 무언가를 받은 경우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이가 어려서, 우둔해서 혹은 잘 한다는 이유로 집단의 일이 개인의 일로 변모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연인, 친구, 모임... 상당히 많은 케이스들이 있겠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의 인품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심결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여나 그런 말이 나오려거든 혹시 내가 분담해야 할 일을 상대방에게 기대버리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일이겠습니다.
집단의 경우 보직을 순환하면서 운영하나 잠시동안의 보직이라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순 없습니다. 그러니 "잘 하고있네"라는 말보단 "그건 내가 다음에 해 줄게"라는 말과 같은 스트레스를 나누어 보려는 위로가 훨씬 고마울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