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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Jul 03. 2018

메일 좀 보내고 밥 먹으러 가자

#011_착각

"부장님 미팅 마쳤으니 식사하러 가시죠." 그놈에 메일은 점심 먹고 와서 보내도 될걸 왜 지금 보낸다고 난리래, 점심시간에 누가 본다고, 사장도 출장인데 적당히 좀 하지. "어, 이 팀장 잠시만, 메일 좀 보내고 가자" 아이고 부장님 그렇게 열심히 하는 척 해도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요.


부장은 미팅 내용을 매번 철저히, 깔끔하게 디자인한다. 다이어리에 펜으로 말이다. "부장님 오늘도 깔끔하게 정리하셨네요. 그런데 어제 펙스트사와 물품 계약은 100개 단위로 하셨나요 1000개 단위로 하셨나요?" 부장은 내가 비꼬려 묻는지 모른다. "음, 글쎄 미팅 내용을 찾아봐야겠는걸, 잠시만 기다려봐." 그 중요한 계약도 기억 못 하다니, 오 신이시여 이 중생을 구원해 주소서. "아니오, 괜찮습니다. 식사 후에 보시죠. 어차피 체결은 다음 달이 잖아요?" 빨리 메일부터 써 제발. "응 그렇지, 근데 펙스트 내부에 문제가 있어서..." 아니, 도대체 펙스트 내부 문제는 당신이 왜 알고 있는 거냐고, 우리 점심 먹는 거나 좀 신경 써줄 수 없겠니? 아이고, 그냥 말하게 뒀다간 또 점심 못 먹는다. "부장님, 그건 식사하면서 얘기하시죠"


미팅 때마다 꼼꼼히 적는 부장을 보면 전생에 서기관이었을 거라는 생각 말곤 하기 어렵다. 맥락도 방향성도 자신의 어떤 제안도 없는, 미팅 내용을 있는 그대로 각지게 적어낸 저 종이들은 컴퓨터의 인쇄물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것을 잘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으로 일을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리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는 알 턱이 없겠지. 


부장은 출장을 가거나 미팅을 갈 때면 항상 옆구리에 서류가 한가득이다. 서류 사이에는 알아듣지도 못할 책을 한 권을 끼고 다니는데, 누군가 궁금해서 묻지 않는 이상 펴는 걸 본 적 없다. 추측컨데 그것이 자신의 지식수준을 대변하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정상적인 점심 쟁취를 위해 꼼수를 좀 부려야겠군. "부장님 오늘 미팅이 길었는데, 좋은 데 가시죠. 새로 생긴 태국 음식점이 있는데 픽업 가능하답니다, 지금 연락할게요." 가끔 엉뚱한 고집을 세우긴 하지만 이런 건 고분고분 말 잘 듣는다. "응, 아침에 출근하다 봤는데, 거기 좋겠다." 부장이 말하는 동시에 전화를 걸어 주문했다. 10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이 답답한 공간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다. "부장님 아직 점심 전이라 5분이면 온다네요. 지금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메일 다 쓰셨어요?" 다 썼을 리가 없다. 내가 10줄 쓸 때 겨우 한 줄 쓰는 양반이니. "어, 5분이면 좀 힘들겠는데, 먼저 가서 먹고 있어 금방 갈게." 그래, 이렇게라도 해야 빨리 나가지. 부장님 혹시라도 저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팀원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부장님껀 제꺼랑 같은 거 주문할게요. 아마 도착하실 때면 음식 나올 거예요." 부장님도 제발 제시간에 점심 좀 드세요. "부장님 거기 지하주차장에 자리가 없을 거예요. 옆 건물에 가능하다니까 거기에 주차하고 올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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