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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Jul 05. 2018

손등 자세히 본 적 있으세요?

#012_시선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세계일주 간다고 짐 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에요. 가족들과 친구들에겐 그저 해보고 싶어 가는 거라며 쿨하게 던지고 왔지만 인생에 큰 결정이라면 그런 것인데, 사진 몇 장으로 만족할 건 아니었어요. 근데 뭘 얻어야 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순 없겠죠.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수반되는, 거쳐가는 한 길목쯤이지 그것 자체가 결론은 아닐 거예요. 짐을 싸며 생각했던 것이 있는데, 아주 커다랗게 벅차오르거나 당혹스러울 만큼 새로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었어요. 어찌어찌해서 어떻게 된다는, 그런 교훈 따위 말고 몸을 관통할 정도로 찌릿해지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근데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있으세요?"


"저는 처음 여행 간 곳이 커다란 폭포가 있는 곳이었는데 벼랑 끝 난간에 매달려 폭포를 위아래로 훑어보니, 여기서 떨어지면 정말 한방이겠구나 라는 공포감이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더라고요."


"아하~ 그런 느낌도 있군요! 잘 기록해 두겠습니다. 자기 전에 어딘지 좀 알려주세요. 다른 분은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일주일 전에 이곳에 와서 내일 떠날 예정인데, 저는 이곳도 매우 멋지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말이죠."


"지금이라면 처음엔 아니었다는 말이군요?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도착했을 때 새카만 밤이었어요. 전등이 없으면 내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죠. 다음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어요. 다행히 캠핑카를 렌트한지라 잠자리는 문제없었지만 기분이 별로더라고요.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오긴 왔는데 보이는 건 없고 비만 내리고, 여기 비 내릴 땐 아무것도 못해요. 엄청나게 오거든요. 둘째 날도 결국 침울하게 보냈죠. 조용히 여기 경치를 그리기 시작한 건 셋째 날부터에요. 아 참, 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런 광활한 장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흥미가 있죠. 나중에 제 블로그 한 번씩 놀러 오세요. 셋째 날 당혹스러웠던 건 이 장소를 보고도 벅차오르거나 하지 않는 거였어요. 그냥 크구나 정도였죠. 그림이야 반 의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런 말 있잖아요. '영혼이 없어 보인다'는 말 그렇더라고요. '지금은 말이죠'라고 한 그런 멋짐을 알게 된 건 넷째 날부터 시작됐어요. 시작된 거예요. 이 순간에도 때때로 다른 감동을 받고 있으니 말이죠. 넷째 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분명 같은 장소를 그렸지만 뭔가 다르더라고요. 이게 뭐지?라는 생각에 저곳을 뚫어지게 쳐다 보기도 하고 전날 그렸던 그림을 유심히 보기도 했지만 거기엔 별게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나선 곰곰이 생각해 보려 고개를 떨궈 팔짱 끼어진 오른손의 손등을 보게 됐는데 그때 알게 됐어요. 손 등에 주름이 많다는 걸요. 혹시 손등에 주름을 자세히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손바닥은 자주 보지만 손등을 자세히 본 적은 없는걸요."


"네, 저도 평소에 손바닥은 많이 봤지만 손등은 자세히 본 적이 없었어요. 그 날 손등을 슬쩍 보고는 팔짱을 풀고 유심히 보기 시작했어요. 손바닥도 봤죠. 나중엔 번갈아 가면서 봤어요. 분명 우리가 손이라고 하는 한 단어로 설명되는 신체 부위인데, 심지어 내 몸 중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부분일 텐데 손등을 자세히 본 적이 없다니, 신기하지 않나요? 다시 이 장소를 둘러보니 뭔가 벅차오르더라고요. 여기가 워낙 멋지기도 하지만 벅차오른다고 하는 건 결국 내가 느낀 감정이더라고요.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건데, 처음 도착했을 때 받았던 실망감을 고집하고 있었나 봐요. 우리가 손을 말할 때 매번 무의식적이게 손바닥을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제는 지금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벅차오르는 걸요."


"자세히 보면 찾아지는 걸까요? 아!, 결국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군요! 참, 친절하시네요. 저 같으면 네 생각이 불순해서 그렇다고 쏘아붙일 텐데 말이에요."


"아니요. 아니에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른데 어떻게 제 경험을 강요하겠어요. 느끼시던 방법대로 느끼시는 게 좋다고 봐요. 어차피 감정인데 답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생각하시는 감정이 제 감정과 동일하다고 할 수도 없는걸요."


"미술 하셔서 그런지 단어들이 세련되셨네요. 하하하. 말씀하신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스스로를 억눌렀나 봐요. 뭔가 얻어가야 한다는 생각, 강박증처럼 얽매여 있었나 봐요. 안절부절못하고 그런 것을 찾아 헤매는 지금 모습을 돌아보니 해주신 말들이 더 공감됩니다. 죄송한데 자기 전에 그림 좀 볼 수 있을까요? 이야기도 더 듣고 싶어요. 저도 여기 며칠 더 있다 떠날 생각이거든요. 지금 갑자기 내일 아침 이곳의 새로운 모습이 기대되고 그러네요."


"물론 괜찮죠. 취미로 그리는 거라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지금 그림을 가져올게요. 제 블로그도 소개할 겸 다 같이 봐요. 감상평도 좀 들어보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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