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시콜콜 Jul 06. 2018

피해자

#013_망상

<1>

  "그림 그리는 것 너무 재미있지 않니? 선과 선만의 조화로도 이런 멋진 장면이 연출되다니, 두 시간 내내 직선만 그었는데도 너무 신나. 멀리서 보면 그저 선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어디서 긴장했는지, 딴생각했는지, 힘이 들어갔는지 한눈에 보이는 걸. 휴, 아직 대학 가려면 5년이나 남았는데, 방과 후 활동 두 시간뿐이라니 너무 가혹해. 아까 선생님이 8월 미술대회 나가보라는데, 정말 소질 있는 걸까? 칭찬은 많이 하시지만 내가 정말 가능성 있는 건지 의문이 들어."


  "칭찬받아 좋은가 보다? 난 뭐, 재미도 없고 잘 모르겠다. 친구들이 하자고 해서 했지만 두 시간 내내 직선만 그리는 것도 짜증 나고, 너는 커서 그림이나 그려라."


  "응?, 아 그래."


  내가 마치 사물이 된 것 같았다. 화가라는 그림 그리는 직업이 있지만 친구는 그 화가를 말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도 오늘처럼 똑같은 선만 그으라며 조롱한 것이다. 나는 분명 유연하고 자유스러운 인간인데 그 한마디가 나를 뻣뻣한 물체로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2>

  "잘 지냈어? 너무 오랜만에 본다.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너만 취칙했잖니. 4년 차 되니까 어때? 밑에 직원들도 많겠네?"


  "어, 뭐 여행도 많이 다니고 살만해. 인간들이야 어딜 가나 똑같다잖아, 짜증은 나는데 요즘은 할 말 다 하고 살아서 스트레스도 별로 안 받아. 밑에 애들이 고생이지 뭐. 너는 대학교에서 뭐 하는 거야? 미학? 그게 뭐야. 대학교에서도 그 선 같은 거 그리고 그래?"


  "아니, 대학교가 그런 거 하진 않지. 잠깐만 집에서 전화가 왔네 전화 좀 받고 올게"


  집에 급한일이 생겼다며 문자만 남기고 카페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과거에 받지 못한 칭찬의 패배감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건지, 자신만 대학교를 가지 못한 일로 비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뒤틀린 심정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8년이나 지난 지금도 저 조롱하는 듯한 말투와 태도는 변함없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손등 자세히 본 적 있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