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시콜콜 Aug 17. 2018

대화

#042_대화

주 52시간 근무는 내 인생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아내와 말로만 하던 세계일주까지 하게 되었으니 아주 큰 공간이 생긴 거겠다.


예전엔 나만의 시간이 없었다. 오직 일에 집중했다. 아니 일 말고 다른 건 할 줄 몰랐다. 주말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게 여유 있는 인생인 줄 알 정도였으니. 아내의 결혼 조건이 세계일주였지만 그녀를 붙잡기 위해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결혼 후에도 줄곧 일에만 빠져 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와는 점점 멀어졌다. 잔소리 많던 그녀도 내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했다.


다시 그녀와 대화하게 된 건 주 52시간이 시행되고도 6개월이나 흐른 뒤다. 처음엔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집까지 가져왔는데, 6개월이 지난 어느 시점부터 아내의 표정, 눈빛, 손짓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혼 전의 밝고, 활기찼던 몸짓들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게 보였던 것이다.


불안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나를 향한 원망이었을까? 아내 스스로는 자신의 변화를 알지 못했을 테지만, 어둠 섞인 무의식의 몸짓을 나는 알고야 말았다. 그녀의 그런 행동이 주 52시간 시행도 모자라 일까지 때려치운 이유다.


다행히 세계일주를 시작하고 한 달 만에 가까워졌다. 가끔 예전 아내의 불안해 보였던 모습의 이유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는다. 괜히 옛 감정 들춰 어둠을 끌어내고 싶지 않고, 지금 그녀는 즐겁고 행복해 보이니까. 손가락, 발가락 끝 까지도 웃음이 묻어나니까.


세계일주 1년이 다 되어가니 목소리, 몸짓, 표정, 눈빛, 손끝의 작은 움직임으로 그녀를 이해한다. 굳이 언어는 필요 없다. 그게 우리의 대화법이다.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집중한다.




'사진을 쓰다' 콘텐츠는 온라인상 저작권 문제가 없는 사진들을 선별, 사진을 보고 떠 오르는 아이디어를 글로 적어내는 콘텐츠입니다. 산문, 에세이, 소설, 시 등 글로 표현된다면 어떤 방법이든 제한되지 않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범행 현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