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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Sep 26. 2018

언어 폭력

#061_언어폭력

“형, 그게 말이 돼요? 지금 한창 취업해서 돈 벌어야 할 시기에 뭐하는 짓이냐고요.” 잭은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는 피터를 챙겨야 할 짐으로 생각하는데, 최근 취업은 안 하고 몇 날 며칠 영화만 보고 있다며 한심히 취급한다.


(그게 말이 됩니까! 직장에 나오는 이유가 뭔데요? 최소한 직무에 대한 책임감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조그만 바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때 주목받았던, 불과 5년 전 일이 떠올랐다. 상사에게 했던 말이다. 나태해 보였던 다른 직원들을 싸잡아했던 이야기. 명예욕이라던지, 남을 깎아내리려던 의도는 아니다. 정말 회사를 위하는 맘이었다. 결국 사람들을 이해 못하고 뛰쳐나왔고, 그것의 폭력성을 깨닫는데 5년이나 걸렸다.


“잭, 피터도 뭔가 생각이 있지 않겠어? 취업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형님, 모르시는 말씀을, 세상이 또 다르다고요. 게다 피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면 우물쭈물하기만 하고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향해야 할 목적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올라야 할 정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한창 열정으로 달려야 할 시기에 사기를 꺾어버리는 행위인 데다 그런 나의 언행도 폭력적일 수 있으니. 잭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심정이 나의 5년 전 심정과 완벽히 같으리란 보장도 없고, 잭이 살아가면서 나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리란 보장도 없다. 결국 스스로 배워가야 할 뿐.


“잭, 피터도 네 마음 알 거야.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은 좋은 거지만 지나치면 잔소리밖에 안된다고.” 좋은 대답이었을까? 명쾌한 답을 줬으면 좋으련만. 명쾌함, 그 확신 가득 찬 말에는 먼저 나이를 먹었다는 권력적 과격함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기에 또 흐린 답을 주고 말았다.


어쩌면 이런 나의 태도 덕분에 많은 후배들이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잭과 나는 10살 차이에도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니까.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서가 아니라 항상 그가 보는 세상에서 이해하려 했으니까. 사람이 무언가 먼저 해봤다는 것은 경력, 경험이라 포장된 권력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 관계에서 겪지 못한 자는 폭력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꼭 같은 경험을 하리란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뛰어 올라갈 때 보다. 높히 서서 아래를 내다볼 때가 더 조심스럽다. 끌어줘야 할지, 길을 가르쳐 줘야 할지, 그냥 둬야 할지. 과연 무엇이 그를 위해 좋은 일인지 모른다.


“형 말이 맞네요. 제가 부모도 아닌데 말이에요. 하하. 그래도 친구잖아요. 피터와 나 사이에 그 정도 걱정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정답은 없다지만 그 말은 맞다. 네 걱정까지 문제 있다고 할 순 없지.” 걱정하는 마음까지 문제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세상에 먼저 내디뎠다고 인생을 먼저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 말하고 싶었다. 인생은 교과서 공부하듯 빨리 넘겨 볼 수 없는 거니까. 그리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이도 내 삶의 가치관일 뿐.





'사진을 쓰다' 콘텐츠는 온라인상 저작권 문제가 없는 사진들을 선별, 사진을 보고 떠 오르는 아이디어를 글로 적어내는 콘텐츠입니다. 산문, 에세이, 소설, 시 등 글로 표현된다면 어떤 방법이든 제한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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