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_가치
"전깃줄이 없으면 전봇대도 쓸모없는 걸까?"
5년 간의 동호회 회장을 내려놓은 지 일 년이나 흘렀다. 비영리 모임이지만 200명이나 되는 회원을 위해 꽤나 시간을 투자했다. 직책만큼이나 헌신해야 한다 생각했고, 좋은 모임 만드려 내 생활을 버리다시피 했다. 그저 동호회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게는 그것 이상이었다.
무사히 모임을 이끌어 냈고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무언가 어긋남을 깨달을 건 이취임식이 끝난 한 달쯤 후였다. 10킬로나 급격히 빠진 나는 모든 것에 전의를 상실했고, 무기력했다. 여유를 찾은 만큼 생활은 다채로워지리라 생각했건만, 되려 단조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물이나 식물을 키워보라는 말에 여건상 식물을 키웠는데, 무슨 이유인지 한 주를 못 버티고 시들었다.
그리도 서럽게 울던 날은 3번째 시들던 날이다. 무슨 오기였는지 똑같은 식물을 다시 키웠는데, 3번째 시들던 날 밤새 울었다. 죽음이 슬펐던 게 아니다. 어떤 것도 내 삶의 길이만큼 나를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할퀴었고, 그 현실이 스스로를 상실케 했던 거다.
정신을 차린 건 반년 정도 뒤다. 신임 회장이 내가 걱정된다며, 아파도 밥 한 끼 먹으러 나오라는 말을 남겼다. 출석이 부진한 회원들에게 안부를 묻는 건 회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하필 그때, 그 순간, 걸려온 전화가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헌신했던 것이 아니라, 회원들 덕분에 5년이나 내가 채워졌단 것이다.
가능한 방을 넓게 쓰려 안 쓰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오래된 물건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죄다 버렸더니 허전한 감이 있지만, 되려 마음이 그득하다. 남을 위했던 배려와 헌신이 결국 나를 위한 거짓된 이타심임을 알게 되자, 내가 갈구했던 동반자를 찾게 됐다. 상실감은 나를 잃어 생긴 감정이다. 애초에 밖으로부터 나를 치켜 세운 게 문제였다. 스스로 서야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일분일초도 버티지 못하는 겁쟁이 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어설피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3번째 식물이 죽던 날 그 예상은 진실이 됐고, 무의식에서 까지 꽁꽁 숨기려 했던 나약함이 모두 뱉어졌다. 나는 누굴 위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한 채 밤새 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약간 비틀거리긴 해도 혼자 설 수 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나는, 나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제는 어느 모임 회장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직장, 어느 직업, 어느 학교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그저 나다. 내 삶의 이유는 오롯이 나에게서 비롯된다. 나는 내 이름 세 글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니까,
"전깃줄이 없데도 전봇대는 쓸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