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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Jan 24. 2021

나를 두렵게 했던 것

#120_불확실성

바늘이 들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야 하는 타입이다. 주사 맞을 때 말이다. 심지어 엉덩이보다 손등 주사가 낫다고 생각할 정도다. 간호사의 “주사 놓습니다.”라는 말 후 채 1초도 넘기지 않고 바늘이 내 표피를 뚫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엉덩이 주사를 맞을 땐 그 시간이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바늘이 체내에 들어온 이후 아프다는 생각은 없다.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 도중도 그렇고. 이미 바늘이 내 몸에 닿은 이후라 되려 마음이 차분하다. 문제는 바늘이 내 몸에 닿는 찰나다. 눈으로 보고 있다면 그 시점에 정신적, 신체적 이완을 가하지만, 보이지 않을 땐 온몸의 세포들이 곤두선 채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바늘을 기다려야 한다.


동아리 훈련부장을 1년간 했었다. 기초 운동을 힘들게 시키는 편이었는데, 동일한 운동량이라도 지도할 때와 지도받을 때의 힘듦 정도는 차이가 컸다. 지도할 때에도 훈련은 항상 같이 수행했는데, 심지어 지도받을 때 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도 수월히 느껴졌다.  훈련을 시킬 땐 운동 분량을 알고 있지만, 받을 땐 정확한 분량을 모른다. 시간을 정해놓고 한데도 운동 효율을 위해 중간중간 내용을 바꾸기도 하니까. 지도하는 사람은 훈련 도중에 강도 높인데도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안다. 하나 받는 사람은 얼마나 더 버텨내야 할지 알 수 없다.


불확실.


인생의 많은 순간, 불확실을 마주하며 불확실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이렇게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이 정도 스펙이면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을까? 이 정도 벌면 잘 사는 걸까?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려 미신 따위의 믿음으로 평안을 찾으려 해 보지만 도피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확실에 대한 대안으로 과신, 망상, 자기 회피 등의 상태를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매사에 과한 불안감을 품기도 하고, 과하게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유형도 있다. 무엇이건 심리에 좋지 않다. 나쁜 일이 발생할 때면 누구를 탓하거나 본인의 부족함 때문이라 받아들이니까. 탓하는 게 나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불안감 회피의 수단으로 자기 계발을 택해봐야 당장은 무언가 채워진 것 같지만, 결국 황폐한 가슴만 남는다. 삶을 재단하려 들면 인생은 더 불행하다.


불확실을 받아들이라 한다.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고,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니 괜한 두려움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바늘처럼 내 몸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1시간만 머물다 가라며 시간을 정해줄 수도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방목해 보려 하지만 그조차 어렵다. "어떡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조차 또 다른 불확실이다. 그것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정말 불확실로 부터 생성되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인가 조차 누구도 모르니까. 


한때는 즐거움으로 이겨냈다.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고 했던 것처럼.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예측할 수 없어서 즐겁다. 이미 다 알고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개그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로부터 웃음을 자아내는 만큼, 인생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주는 즐거움이 있다. 요즘은 기대라는 심리를 이용한다. 오늘 행했던 것들이 내일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말이다. 나쁜 결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대하는 맛이 있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은 아니다. 성인들은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런 방법이 가능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희석시키는 방법이다. 불확실을 밑천으로 생성된 두려움을 기대로 희석시키는 방법.



2011 여수 돌산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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