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기 Mar 27. 2021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기대되는 삶

#123_기대

"내가 그렇지 뭘."


실패, 실망을 마주했을 때 튀어나오는 말이었다. 내 처지에 좋은 일은 없었을 것 같았으니까. 운명이라는 걸 믿었던 것도 있고, 저런 말을 뱉고 나면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해서였다. 정해진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한 건 고작 2년 정도인데, 그전까지 인생은 참 고단했다. 운명이란 건 무언가 정해진 것이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였는지 세상의 이치, 옳고 그름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고단의 근원지는 여기다. 정답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 남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깨달음은 한순간 찾아왔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뀌려는 시도는 했던 것 같다. 단순하게도 깨진 유리잔 덕분에 알게 됐지만. 혼자 살기는 조금 큰 집으로 이사 오면서 친구들을 자주 초대했는데, 3번 방문에 컵 하나 정도는 깨진다. 원래 그런 류의 일이 발생하면, 괜찮은 척 하지만 속으론 힘들어하며, 원인을 찾는 타입이었다. 우연이라고 보면 됐을 것을 인과적 원인이 있는 마냥 맞고 틀림의 기준으로 구분했다. 원인을 찾게 되면 항상 탓할 대상을 만들었고, 그 대상은 주로 자기 자신이었다. 한데, 어느 날 깨진 유리잔을 보고도 아무 탓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되려 즐겁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리잔이 깨져서 즐겁다는 건 아니다. 인생도 깨진 유리잔과 같이 알 수 없기에 즐겁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정해진 인생이 있어서 정해진 삶을 따라가야 하는 인생이었다면, 지금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거다. 


자발적으로 복권을 산 건 최근이다. 그런 운 따위는 내 인생에 없을 거라 했지만,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는 인생이니까. 설사 당첨되지 않는다고 해도, 운명을 탓하진 않을 거다. 당첨되는 것도 되지 않는 것도 단지 우연일 뿐이니까. 인생은 알 수 없다. 정해지지 않은 우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예전의 내겐 그런 우연들이 스트레스였지만, 이제는 기대한다. 어떤 우연으로 즐거워질 수 있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