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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봉실장의 기획서 Mar 27. 2021

시기나 질투가 많은 타입입니다.

#124_비교

'시기나 질투가 많은 타입입니다.'


우연히 들린 인터넷 사주사이트가 알려준 내 성격.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날은 한참 동안 그 문장에 머물렀다. 장난으로 검사를 하던 고가의 검사를 하던 시기나 질투가 많다는, 혹은 그와 비슷한 결과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마음먹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문장에 머무른 건,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려는 노력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 동안 내 정신 저변에는 '명심보감'의 이념들이 촘촘히 깔려있었다. 서른이 넘어서부터야 유교적 이념이 나를 갉아먹는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전에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는 책을 놓았지만, 어린 시절엔 책을 상당히 좋아했다. 약간의 편식은 있었지만 독서 분량으로는 반에서 2위 수준이었다.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읽은 책이 과학 백과사전이고, 두 번째가 명심보감이다. 동경했기에 많이 읽었고, 자연스레 인격을 형성했다. 그런 덕분에 어느 직장이건, 단체건 인정받아 온 건 사실이다. 지금은 원치 않는 삶의 방식이지만.


마인드가 바뀐 것은 서른 중반에 가까워지며 생긴 문제 때문이다. 유독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었는데, 나이가 들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부터는 한주 이상 운동을 쉬어 본 적이 없는데도, 무기력과 체력 저하가 눈에 띌 정도로 보였다. 대학시절 금전 문제로 제대로 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신체가 망가진 것이 한몫했겠지만, 그것만 원인으로 보기엔 시시각각 달랐다. 주로 기복의 문제였는데, 감정에 따라 체력이 급감하고 얼굴색마저 거뭇해졌다. 억압 때문이란 걸 알게 된 건 서른 중반에 다달해서였다. 사회생활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다. 하루에 수십 번씩 짜증도 나는 게 사회생활일진대, 나는 대부분의 감정을 억압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억누른 건 아니고 짜증은 많이 낸 편이다. 억눌렀다고 생각하는 주된 감정은 분노에 관한 감정이다. 짜증을 내는 방향은 스스로에게 이거나 사물이었기 때문에 딱히 억누르지 않고 표출했지만, 분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표출할 수 없었다. 근래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인간이 선택적으로 한 가지 감정만 억누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당시 빌어먹을 유교사상에 지배당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분노를 억압하겠다고 한 행동이, 분노만 억압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엮인 많은 것들을 억압해 버린 것이다. 꾹꾹 눌린 감정은 올바르게 해소되지 못했고, 결국 신체에 위험 신호까지 보내왔다.


분노는 억압할 감정이 아니다. 해소해야 한다. 원인을 찾아야 하고, 상대가 문제라면 상대에게 정중히 표현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할 경우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해소해야 한다. 암을 치료한 지인이 말했다. "우리는 너무 참고 산다. 할 말은 해야 하는데." 암을 치료 중이 사람들끼리 모이는 모임이 있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라 한다.


지금까지 분노의 억압으로 인한 문제를 말했고, 초입에 언급한 내용을 이어가면. '시기나 질투가 많은 타입입니다.'를 보고 스스로를 객관화해 보려고 노력했다는 건, 다른 방향에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서두에 시기나 질투가 많다는 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을 굉장히 많지만 몰랐던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심리 테스트 따위는 속여온 거다. 의도적으로 속였다기 보단, 동경의 대상이 시기나 질투는 하지 않는 인생이었기 때문에 내 본성과는 관계없이 나는 그런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속인 거다. 인격을 사회적으로 갈고닦은 성질이라고 한다면,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다. DNA나 뇌 구조상 성격이라는 특질은 일부 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는 인격을 가져야 했던 것인데, 그것이 스스로의 성격이라 착각해온 거다. 분노도 그렇다. 사회가 지향하는 올바른 인격의 모습으로 보자면 참거나, 정중한 표현으로 해소하면 된다. 하지만 남보다 분노의 사이즈가 크다면 그 정도로 해결이 안 되는 거다. 참지 않고, 할 말을 한다고 해도 해소가 안 되는 거다. 분노를 예를 들었는데, 분노가 남보다 많은 타입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시기나 질투가 남보다 많다는 것에는 갸우뚱한다. 그러니 단순히 억압의 문고리를 여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혹시 내가 남보다 시기나 질투가 많은 건 아니었을까?'


내 방법은 받아들임이었다. 시기가 많다면, 남보다 시기가 많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해도 생각보다 많은 게 해소됐다. "축하해" 보단 "와, 정말 부럽다 나도 하고 싶다."라고 표현하기만 해도 마음이 한결 편하다. 물론 축하한다는 표현 만으로도 진심이 표현되는 사람이 있다. 약간의 시기나 질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건 표현하는 것 자체로 해소되기도 하니까. 한데, 나 같은 타입 그보다 조금 더 스스로의 욕심을 드러낼 말을 곁들여야 했다. 비꼬는 표현이 된다면 심각한 문제지만, 적당한 솔직함은 되려 상대의 호감을 사는 장점이 되기도 하니까. (솔직함과 배려는 구분해야 한다.)


 정말로 그런 감정이 남보다 많은지는 알 수 없다. 감정의 강도를 측정할 수는 없으니까. 심지어 나의 '시기'감정과 남의 '시기'감정이 동일한 감정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남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한다. 요즘 최고 이슈인 인공지능의 머신러닝, 딥러닝 기술은 내용은 복잡해도 결국 고양이냐, 개냐의 문제다. 수많은 사진을 기준으로 고양이인지 개인지를 구분해 내는 게 기술의 목표다.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것도 그렇다. 거울 앞에 서서 뚫어지게 본다고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찾은 본인은 이상향일 가능성이 높다. 이상향의 모습과 실체의 간극이 크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벌어짐이 심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비교한다. 사회적 지휘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기 위한 비교를 한다.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내공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려는 노력에서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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