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에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는 시기였을까. '참지 말자'라는 식의 메시지가 우리 문화에 스며든 것이. 사회와 개인의 삶에 부정하고 불편한 것들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됐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극단적으로 행하는 태도들은 되려 참지 않는 것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버티는 것은 무식하게 참는다라고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생겼다고 본다.
버티는 행위를 부당하고, 어려운 상황을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으로 단순화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부당함에 대해 버티는 것과 어려운 상황을 버티는 것은 다른데 말이다. 부당함에는 당연히 대응해야 한다. 하나 그 조차 극단적인 반항보다는 소통 기술과 같이 적절한 대처 기술들이 필요하다. 단련을 위해 버티는 행위는 무엇이 필요하다기 보단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는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물론 구분은 모호할 수 있다. 인간사 명료하게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한 것을 잘 정리하여 구분하게 되는 것조차 버티며 배워야 할 능력 중 하나다. 버티는 행위는 대게 고통을 수반하는데, 고통을 단순히 인내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주하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히고, 어려운 순간을 인내하며 스스로를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됨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즉각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극한의 효율 추구 시대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즉각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 과정 까지도 번득이는 어떤 생각으로 인한 결과물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빠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 자체는 오랜 기간 버티고 다듬으며 쌓은 역량이란 것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고, 요즘은 그런 단어를 쓰진 않지만 그래도 몸에 배어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는 서당이 있다. 서당에서는 가장 먼저 천자문을 외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외는 것으로 천자문을 떼다고 하지 않는다. 문자 하나하나가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야만 천자문을 떼다고 한다. 그 과정에는 버팀이 있고, 노력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 그러니 부당함에는 잘 풀어갈 수 있는 현명함을, 고난에는 버텨내는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공학 분야에서 오버슈트(Overshoot)라는 말이 있다. 어떤 신호의 값이 목표값 보다 더 크게 나오는 현상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목표값 기준으로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점차 잦아들고, 결국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스프링을 튕겼을 때 점점 찾아들게 되는 모습과 비슷하다. 눈여겨볼 특징은 목표로 향하기 위한 속도가 빠를수록 오버슈트가 크다는 것이다. 이 모습이 마치 빨리빨리 성향이 내재된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가 생겼을 때 그것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부분과 닮아 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문화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니 현상을 나쁘게 보고 고쳐야 할 점을 먼저 말할 게 아니라 서로의 마음부터 보듬어 줘야 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