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아침에 들은 표현인데, 정확한 문장은 아니지만 의미는 일치한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인생의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순간은 후회로, 어떤 순간은 되려 확신을 더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온전히 내 것으로 녹여낸 것을 보니까.
우리는 어떤 현상에 이성의 판단을 꺼내드는 경우를 종종 맞이한다. 그러다 의문이 생기면 뭉뚱그려 "내가 이래서 그래, 저래서 그래"라고 결론짓는데, 사실 그건 스스로를 잘 몰라서 그런 것 아닐까?
은유는 감정을 판단이 아니라 관찰로 바꾼다. 이를테면 "힘들다" 대신 "마음에 먼지가 쌓인 것 같아"라고 말하면, 질문이 생긴다. 어떤 먼지일까? 언제 쌓였을까? 무엇으로 환기시킬 수 있을? 이런 질문은 호기심에 기인하고, 호기심은 삶을 다시 즐거움으로 끌어당긴다. 고단한 하루에도 "왜 그럴까"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순가, 삶의 질감이 달라진다. 은유가 현실을 바꿔주는 건 아니지만, 현실을 대하는 내 시선을 바꿔준다. 그래서 삶이 아름다워진다.
다만, 은유만으로 충분하진 않을 테다. 은유가 감정을 잘 보여주는 만큼 더 그럴싸하게 만들곤 한다. 순간의 감정은 강하고, 은유는 그 강함을 더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순간, 순간의 감정에만 휘둘릴 수 있다. 감정이 한 장면이 아니라 전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은유 뒤에는 반드시 그것을 논리로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감정과 논리는 대치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밀고 당기는 관계가 아니라 이해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유 없는 감정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 감정은 늘 어떤 통로를 따라 내게 들어오는 이유다. 그래서 논리적 정리는 그 통로를 확인하는 일이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무엇을 지나 여기까지 왔을까?
왜 나는 그렇게 느꼈을까?
이 질문들은 나를 끌고 가는 질문이 아니다. 되레 나를 설명한다. 세상 누구도 똑같이 갖지 않은 내 안의 독특함 문화,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에 취약하며,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를 드러낸다. 감정은 그 문화가 보내는 신호이고, 논리는 그 신호를 읽어내는 방법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고유해진다.
은유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
논리는 내가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