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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14. 2019

[영화 에세이]#11. 더 랍스터(2)

별, 불나방 그리고 우리들 - <로미오와 줄리엣>의 변주

영화 <더 랍스터>

허나 도시로 탈출하려는 이들의 계획은 이내 탄로 나고 만다. 그 대가로 숲의 리더는 근시인 여자의 눈을 멀게 만든다. 이때부터 데이비드와 근시인 여자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데이비드는 혈액형과 베리, 피아노를 들먹이며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나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는 동질성에 기반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질성에 기반한 사랑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스틱한 사랑이다. 나르시시즘은 내면으로 에고를 투사하는 유아기적 사랑. 이러한 사랑은 미성숙하다.(*)


* 데이비드는 자신보다 더욱 근시인 남자에게 아내를 빼앗겼을 것이며, 근시인 여자에게 토끼를 준 남자가 근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다.


 한편 몸짓으로 비밀의 언어를 구축한 그들은 더 이상 밀어(密語)를 나눌 수 없게 된다. 그들의 밀어는 유아의 언어를 닮아있다. 유아기에 아이들이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며 사물에 자신만의 언어로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사회에서 용인된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력의 상실은 개인적 언어의 상실을 의미하며 사회에 융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영화 <더 랍스터>|  "Do you like berries? Blueberries? Blackberries?"

 이질적으로 보이는 호텔과 숲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박탈한다. 호텔에서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음에도 사랑을 하는 척해야 하며, 숲에서는 사랑에 빠졌음에도 사랑을 하지 않는 척해야 한다. 두 세계가 자행한 자위와 섹스의 박탈은 공통적으로 자유의지를 거세한다. 테제(these, 호텔)와 안티테제(antithese, 숲)의 충돌은 진테제(synthese, 도시)를 생성할 터. 자유의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도시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더 랍스터>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를 비트는 모습을 보인다. 이름을 호명하는 행위는 필히 정체성을 환기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름을 버리는 것으로 구축된 사회를 부정하며 자유의지를 구축한다.(*) 반면 영화는 이름이 없는 세계이다. 호텔과 숲의 인물들의 이름은 호명되지 않는다. 각본에 유일하게 이름으로 쓰인 인물은 오직 데이비드뿐.(*) 데이비드는 이름이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유의지를 구축할 수 있는 인물이다.


* Juliet: What's in the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 각본을 살펴보면 비정한 여자는 heatless woman, 코피를 흘리는 여자는 nosebleeding woman, 근시인 여자는 short-sighted woman, 숲의 리더를 loner's leader라고 칭한다. 심지어 늑대에게 다리를 물린 친구 '존' 조차도 limping man이라고 등장한다. 숲에서 사냥을 나온 186호를 마주쳤을 때 데이비드는 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탈출은 데이비드만이 수행할 수 있다. 앞서 탈출의 감행은 탈피의 순간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의 탈피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앞서 자유의지가 거세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미성숙한 사랑을 한다고 언급했다. 문제는 도시 역시 동질성의 논리로 점철된 사회라는 것. 도시로 입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질성을 가져야만 한다. 허나 이는 미성숙한 사랑으로의 회귀일 터.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거세하는 행동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자살을 함으로 주체적 사랑의 완성을 그려냈지만, 데이비드의 눈을 찌르는 행위는 주체성의 박탈로 귀결된다.

영화 <더 랍스터>

 그렇기 때문에 데이비드는 쉽사리 눈을 찌르지 못한다. 눈을 찌르면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찌르지 않으면 도시로 입성할 수 없기에 탈출의 실패인 바. 여기서 우리는 도시의 대립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가 구축한 세 공간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구성된, 소위 연극적 성격을 지닌다. 더군다나 등장인물들의 익명성과 지속적인 보이스오버, 절정 부분에서 극을 중단하는 것 등은 '낯설게 하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낯설게 하기'는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거부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구축된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작위적 설정으로 우리는 낯선 도시에서 눈을 돌려 성숙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을 상상하게 된다.


* 소격 효과: 브레히트가 주창한 개념으로, 관객이 극에 몰입되지 않아야만 비판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주장.


 허나 문제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작중에 비정한 여자의 서술에 따르면 거짓으로 꾸민 관계는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 처벌이란 아무도 원치 않는 동물이 되는 것(*). 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45일이 지나고 되고 싶은 동물로 온갖 것을 말한다. 개처럼 흔한 동물부터 잡혀가기 십상인 희귀 동물까지. 그렇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누구도 그 질문에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 거짓된 관계를 하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만이 거짓된 관계를 꾸며내며 거짓된 관계를 하는 것은 사람의 습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꾸며낸 거짓 사랑이 어찌 성숙할 수 있으리. 결국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탈피하지 못한 채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할 운명인 셈이다.


* Heartless woman: I can't understand why you did it when you know as well as anyone that a relationship cannot be built on a lie. (중략) They turn into the animal no one wants to be.


 불나방. 반짝이는 것에 대한 열망으로 제 목숨을 내던져 뛰어드는 모습이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불나방이 불을 사랑하여 그에게 뛰어드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은 꽤 나중 일입니다. 그저 빛을 향해 일정 각도를 유지하 비행하는 나방의 습성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정해진 각도대로 비행하다 보니, 나선을 그리며 결국 불빛 주위를 빙빙 돌면서 타들어가는 필멸의 본성이었습니다. 혹은 무지(無知)였습니다. 지상의 불빛을 하늘의 달빛으로 착각한 나머지 행해진 빈약한 탐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총을 쥐어봅니다. 지상에는 없을지라도 하늘을 바라보면 무엇보다 빛나는 별이 있으니까요. 빛을 향해 날아가는 것은 그저 내 본성일 지라도 밤공기 헤치는 날갯짓은 온전히 내 뜻이니까요.

 오늘 밤에는 옷을 한 꺼풀 벗어던지고 불나방으로 탈피할 겁니다. 그럼 밤하늘에서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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