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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Jan 27. 2019

[영화 에세이]#12. 세 번째 살인(1)

불신과 상실의 시대에서의 인간의지의 발현에 관하여

불신과 상실의 시대에서의 인간의지의 발현에 관하여



 '말'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 세상에선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스케치북에 글씨를 써서 대화를 한다. 행여 언성이 높아질 새면 커다란 스케치북을 꺼내 들어 새빨간 매직펜으로 굵게 고함을 친다. 언제나 화낼 생각을 가진 이는 등짝에 커다란 스케치북을 메고 다니며 그의 주머니엔 한가득 빨간 매직펜이 담겨있다. 그런 세상에선 혹자같이 소심한 이들은 이런 이들을 피해 다니느라 바쁘겠지요.


 허나 우리가 발디딘 세상은 많은 말들로 점철되어 있. 시골에 가면 꾸욱-꾸욱-대는 비둘기의 말이 있고, 여름에는 매미가 요동치며 말을 건넨다. 잠드려 누운 자리에는 기어코 모기가 기어 나와 귓가에 앵앵거리기도 한다. 개중 가장 믿을 수 없고 무서운 것은 단연 사람들이 내뱉는 말. 우리는 말로 누군가를 해치고, 법을 세우고, 교리를 전파하며, 심판한다. 이런 말들은 우리에게 불신을 심으며 개인의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공허하게 만든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을 절대적 진실은 없다. 다만 가고픈 곳으로 발 내딛으면서 스스로 실존함을 느끼고 그것으로 공허함을 메울 뿐. <세 번째 살인>(2017, 고레에다 히로카즈)은 두 번째 살인을 맥거핀으로 하여 보편 논쟁으로 관객의 눈길을 돌린 사이, 세 번째 살인으로 우리네 실존을 주창한다.

 
            

I. 숫자 '3'     


 <세 번째 살인>은 디제시스를 구축하는 데 있어 숫자 '3'을 이용한다. 먼저 인물들을 살펴보자. 영화에는 세 개의 가문이 등장한다. 세 가문 안에서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원죄를 상속한다. 시게모리는 판사였던 아버지가 온정적인 판결을 내렸던 탓에 다시 일어난 두 번째 살인사건을 전담하고 있다. 미스미의 딸은 첫 번째 살인 이후 경찰들이 찾아와서 홋카이도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버린다. 사키에는 위장 식품으로 벌어들인 더러운 돈으로 성장한다.
   

 세 가문은 수직적인 구조에서 유사하게 병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평적 연결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도구는 땅콩버터. 시게모리가 급식으로 많이 먹었다던 땅콩버터는 사키에가 미스미에게 선물하고 미스미는 교도소 안에서 땅콩버터를 먹으며 미소 짓는다. 한편 시게모리가 키우던 물고기, 미스미가 키우던 카나리아, 사키에가 키우던 토끼는 각자 걸맞은 이유로 죽었다.(*) 이외 사키에가 시게모리와 미스미가 자란 훗카이도로 떠나려 하거나, 사키에와 미스미의 딸이 절름발이로 나타나는 등 세 가문은 밀접한 연관성으로 대구를 이루며 인간군상을 제유한다.   
  

* 시게모리의 물고기는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미스미의 카나리아는 미스미에 의해서, 사키에의 토끼는 외로워서 죽는다. 동물들의 죽음은 인물들의 처지를 대변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숫자 '3'은 인간군상뿐 아니라 우리가 발 딛는 세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사회는 종교와 법으로 표상된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3가지 위격(persona)이 一體를 구성하는 것. 즉, 삼위일체로 유일신 야훼 대한 믿음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비슷하게 법정은 ‘법조계’라는 한 배를 탄 판사, 검찰, 변호인의 세 집단으로 구성되고 이것은 법정의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법정과 살인사건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빗대어져 권력과 종교, 사회구조 전반으로 확장된다.

 법정을 구성하는 각 집단들 역시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스미를 변호하는 변호인단도 3명, 판사 측도 3명.(*) 다만 검찰 측은 한 자리를 비워 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 말미에 이르러 미즈미가 스스로를 사형으로 몰아넣으면서 검찰 측도 ‘3’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영화에는 세 번의 살인이 등장한다.   
   

* 영화의 도입부에 이 세 명은 택시를 타고 미스미를 찾아가는데 셋이 택시를 탐에도 아무도 조수석에 앉지 않고 모두 뒷좌석에 끼어 앉고 카메라는 이 셋을 나란히 담아낸다. 이는 면회실에서 미스미를 마주하는 변호인단의 배치로 이어진다.     
영화 <세 번째 살인>| 각 집단은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미스미가 자신을 살해하는 것에 동참하면서 검찰 측도 '3'을 이루게 된다.



II. 심판   
  

 작중에 사키에는 묻는다. ‘누굴 심판하냐는 누가 정한 거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법으로 누군가를 심판한다. 시게모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도 있다고 믿으며, 사키에가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녀의 아버지를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럼에도 그가 행하는 심판에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직업이기에 미스미를 두둔하고 재판 전략에 따라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쪽을 고르며 진실에 관해 논하는 검사를 비웃는다. 한편 미스미는 십자가 모양으로 화형을 집행하며 직접적으로 심판의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그는 사키에를 강간한 그녀의 아버지와 방관자인 어머니를 심판하려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는 카나리아를 묻을 때에도 무덤에 십자가를 만든다.
 

 법에 의하면 원한으로 인한 살인이 돈으로 인한 살인보다 가벼운 죄라고 한다. 원한에 의해서는 살인이 행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 이런 논리가 묵인되는 것은 법이란, 한 발짝 더 나아가 종교는 원한(ressentiment) 위에 세워진 도덕인 까닭이다.(*) 원한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감추며 자유의지를 거세한 종교의 법은 ‘노예의 도덕’이고 현대사회의 부조리의 근원이다. 

  

* <도덕의 계보>(프레드리히 니체)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서 요제프 K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다. 그는 저항하지만 부조리한 재판 과정을 거쳐 결국 사형에 순순히 응하게 된다.(*) <세 번째 살인>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태어났을 때부터 짊어지게 되는 죄, 원죄는 존재하는가. 죄를 단정 짓고 심판하는 것은 어떤 진실에 기반한 것인가. 과연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선악이란 누가 정한 것인가.    

 

* ‘하지만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착오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나 나나,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K는 이렇게 항변한다. 허나 그에겐 ‘옳은 말이오. 그러나 죄가 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죠.’라는 대답이 되돌아온다. K가 일어나자마자 알 수 없는 이유로 체포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지닌 원죄를 의미하며 K로 대변된 우리는 그것에 의문을 품고 반항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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